우울증 치료의 Step.04

이제는 냉정하게 현실을 봐야 할 때

by 구름조각

심리상담을 할 때 상담자와 환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라포(rapport)라고 한다. 서로 공감을 하면서 깊은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이 심리 치료의 첫 단계인데 이건 마치 병원에 가서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팔을 다쳤는데 옷을 걷지도 않고 상처 부위를 보여주지도 않으면 전설적인 명의 화타가 와도 치료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상담선생님과 라포 형성이 잘 된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냉정하게 환자를 정신병자 보는 듯 약만 처방하는 의사들에게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1시간 상담에 100만원을 주고도 변변찮은 병명조차 듣지 못했다고 한다. 마음이 아파서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에게 더 상처를 받고 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에 상담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상담 선생님도 그런 한계를 느낀 적이 있다고 한다. 원래 정신과 의사였지만 약물로 환자를 치료하는 데 한계를 느껴 상담심리를 더 공부해서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한다고 하셨다. 상담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 상담만으로도 크게 증상이 호전된다고 한다.


물론 신뢰관계가 지나쳐 상담사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는 것도 치료에 방해가 된다. 어디까지나 상담가나 의사는 내 치료 의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나 자신이 먼저 건강하게 살겠다는 의지가 강해야 약물이든 의사든 도움을 줄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상담선생님은 내 지나친 라포에 선을 긋기도 했다.



몇번의 상담으로 깊은 우울감이나 시도때도 없이 느끼는 슬픔은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내 감정이 달라졌다고 해도 내 인생이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감정기복을 다루지 못해서 힘들어 했고, 그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도 많이 힘들어 하고 있었다. 나의 문제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나 금전적 문제는 변함이 없었다.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아서 주말 오후에 상담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제가 변하려고 노력해도 주변 환경은 변함없으면 어떡해요?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되려 날 정신차리게 만들었다. 상담 선생님의 역할은 내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지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내 문제의 답은 내가 찾아야 한다.

내 인생은 내가 통제해야 한다.


그 시기에 공교롭게도 유투브 알고리즘에 따라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무속인이 집에 우환이 많을 때 해야할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무속인이 알려준 방법은 이렇다.

예전에는 대들보에 사는 성주신이 집안을 지탱하는 힘이 가장 셌는데 요즘 집에는 대들보가 없어 성주신의 힘이 약하다. 반면 부엌에 사는 조왕신이 집을 보살피는 힘이 강해졌기 때문에 집에 자꾸 나쁜일이 생기거나 가족들의 일이 안 풀리면 부엌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

이 말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부엌 청소를 시작했다. 나도 힘들지만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우리 가족 모두 고통받고 있으니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냉장고를 청소하고 부엌 전체를 다 청소하는데 꼬박 4개월이 걸렸다. 뭐한다고 4개월이나 걸리냐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마와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1시에 일 끝나고 집에 가서 청소를 하기 시작하면 새벽 3시는 되어야 잠드는 생활을 했다. 또 우리집은 주택이었기 때문에 음식물이나 쓰레기를 버리는 날도 정해져 있어서 내 마음대로 찬장을 비우거나 할 수 없었다.


부엌을 하나하나 들춰봤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냉장고에 성한 음식이 거의 없었다. 언제 가져왔는지도 모르는 채소들은 다 비닐에 뭉쳐져서 짓물러 있었고, 고기는 상해 있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이 냉장고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어느 날은 냉장고 한칸을 다 비운 적도 있었다. 그 한칸에 있는 소스병들이 다 유통기한이 3년이상 지나서 말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가 2018년이었는데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이 2004년까지인 미숫가루가 나왔을 때는 잠시 회상에 빠지기도 했다. 2004년이면 우리가 이사 오기도 전인데 이 친구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처음에는 엄마에게 화를 많이 냈다. 이 냉장고를 보라며 윽박지르고, 행여나 엄마가 아까우니 버리지 말라고 하면 매번 그런 식으로 하니까 집안 꼬라지가 이 모양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일 끝나고 쉬고 싶었을 테지만 내가 옆에서 냉장고를 치운다고 덜컹대니 하는 수 없이 옆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 냉장고 바닥에 끈적이는 정체모를 것들을 닦아내고, 폭삭 쉬어버린 김치를 내다 버리고, 냉동실에서 말라 비틀어진 재료들을 버리면서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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