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칼칼한 고추장찌개

고추장찌개의 참 맛은 꾸덕 칼칼한 국물이다.

by 구름조각

저는 비 오는 날이 싫어요. 며칠 째 습한 날씨에 널어둔 빨래에는 꿉꿉한 냄새가 나고, 바닥이 끈적이는 것 같습니다. 화분에 물을 안 준지도 일주일 째인데 이게 웬걸, 버섯이 자라고 있어요. 물을 안 줘도 과하게 습하다는 의미겠지요. 어두컴컴한 날씨에 한 낮도 저녁 같고 하루 종일 공기가 무겁고 몸이 축축 쳐져요. 침대에 누워서 쉬려고 해도 이불이 보송하지 않으니 왠지 짜증이 납니다.


이런 날에는 부침개에 막걸리 한잔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도 아니네요. 뭔가 묵직하고 꾸덕하고 칼칼해서 몸의 온기를 확 올려줄 만한 음식이 필요합니다. 저녁 식사 담당의 권력이란 이런 거죠. 내 기분에 맞춰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 그래서 오늘의 메뉴는 시뻘건 국물이 매콤 칼칼한 고추장찌개입니다.


고추장찌개는 20대 후반에 올리브 TV의 요리 프로그램에서 처음 봤어요. 된장찌개나 청국장찌개는 봤는데, 고추장으로도 찌개를 끓인다니 깜짝 놀랐어요. 뭔가 떡볶이 국물 맛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고추장찌개를 끓여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생활할 때, 그곳의 습하고 어둑한 날씨에 지쳐서 처음 고추장찌개를 끓이게 되었어요. 보기만 해도 땀이 흐를 것 같은 '맛있게 매운맛'이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주었거든요. 그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돼지고기와 양배추, 주키니 호박 같은 걸 넣고 한 솥 가득 끓여서 며칠을 먹곤 했어요.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그 '한국식 스튜'를 좋아했어요. 처음엔 빨간 국물이 토마토인 줄 알고 먹었다가 매운맛에 된통 당하긴 했지만요.


한국에 와서는 그때와는 다르게 끓이고 있어요. 한국에서 똑같이 끓이려 해도 그 나라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아 끓이는 맛은 같지 않더라고요. 음식의 맛은 늘 그 순간의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고추장찌개 레시피도 꽤 맛있다고 자부해요.


저는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찌개용을 숭덩숭덩 썰어 놓고 양념을 미리 해둡니다. 새우젓 한 스푼, 고춧가루 한 스푼, 설탕 조금, 생강과 다진 마늘을 넣고 버무려 놔요. 후추는 미리 뿌려서 끓이거나 가열하지 않아요. 새우젓과 설탕은 고기의 연육 작용을 도와줍니다. 생강과 마늘은 향을 더해서 잡내를 없애줘요. 가끔 고기를 재워놓을 때 미림이나 국간장을 약간 넣어 놓기도 해요. 고기 잡내가 많이 날 때는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조금 넣기도 하고요. 정해진 레시피 없이 냉장고에 있는 대로, 그날의 느낌대로 만드는 게 집밥의 매력이죠.


중불에 고기를 달달 볶기 시작하면 고기의 지방에서 기름이 흘러나오고, 같이 넣은 간장이나 새우젓이 익어가면서 냄새가 정말 좋아요. 고기가 희끗해질 때 고추장도 크게 한 스푼 넣어서 같이 볶아줍니다. 고추장을 만들 때 메주가루, 고춧가루, 조청이 들어간다는 거 아세요? 고추장은 생각보다 꽤 달콤한 양념이에요. 그래서 센 불에 볶으면 금방 타버리기 때문에 은은한 불에 볶아줘야 합니다. 고추장이 어느 정도 볶아졌을 때 쌀뜨물을 넣어요. 찌개에는 쌀뜨물이 국룰입니다. 그리고 바로 감자를 적당한 크기로 토막 내어 냄비에 넣고 한소끔 끓여주세요.


'적당한'이란 단어가 제일 어렵죠? 근데 찌개에 너무 큐브 모양은 어색하고 납작하게 썬 감자는 금세 으스러져요. 도톰한 두께에 숟가락으로 떴을 때 국물과 함께 숟가락 위에 살포시 앉아 있을 정도의 크기로 썰어야 됩니다. 이런 미묘한 크기를 정량화해서 2cm 두께로 썰라고 하면 왠지 재미가 없어요.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감자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요리 책은 모르니까요. 2cm씩 썰다가 끄트머리에 애매하게 남는 조각들이 신경 쓰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늘 자기의 감각대로 요리하는 게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감자가 어느 정도 익으면 양파느타리버섯을 넣어주세요. 애호박을 넣으면 좋은데 오늘은 없으니까 대신 버섯을 듬뿍 넣어주려고요. 양송이, 새송이, 팽이, 표고... 버섯 종류는 정말 많지만 고추장찌개에는 항상 느타리버섯이 잘 어울립니다. 쫄깃하고 국물을 잔뜩 머금은 느타리버섯의 식감이 칼칼하고 묵직한 맛의 고추장찌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버섯은 금세 익으니까 여기에 청양고추대파를 썰어서 넣고 다진 마늘이나 국간장으로 부족한 간을 더합니다. 다 끓은 후에 먹기 직전에 후추를 탈탈 뿌려주세요. 그릇에 담긴 뜨거운 찌개에서 올라오는 김에 후추의 알싸한 향기가 섞여 입맛을 돌게 해준답니다.


예쁘게 보이려고 깻잎과 청양고추를 조금 올렸어요.

오늘은 완두콩을 넣은 밥과 고추장찌개를 준비했습니다. 완두콩의 푸릇푸릇한 색고추장찌개의 새빨간 색이 침을 돌게 하네요. 한 입 맛을 보니 감자가 파근파근하게 부스러지고, 고기는 부드럽고 국물이 칼칼해서 속이 후끈하네요. 뜨끈하게 한 그릇 먹고 내일은 햇빛이 쨍쨍한 맑은 날이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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