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보내지 않은 마지막 편지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J에게
나는 널 사랑했고 너도 널 사랑했으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너는 아마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따위는 알지 못하겠지. 그러니 이 고통은 너를 뜨겁게 사랑한 나만이 누리는 특권이라고 해두자.
옛시대의 현명한 자들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가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했어. 너와의 만남은 나에게 더욱 강해져야 할 이유를 알려주고 홀로 서야 할 동기부여를 줬기 때문에 너를 내 인생에서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적합한 스승이라고 생각할게.
잘 지내길.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 내가 우울증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나 자신을 아끼는 법을 배운 후에 J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다시 보면 어떨까 궁금한 마음에 한번 더 만났다. 어쩌면 달라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다시 만난 그는 내 기억 속에 사랑했던 남자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에게 코가 낮으니 수술을 해보라던 그가 쌍꺼풀과 코수술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자신의 욕망을 나에게 투사해서, 자기의 코가 낮아서 불만인 것을 내 코가 낮다고 지적했던 것뿐이었다. 나에게 코 성형 후기를 자랑스레 읊어대는 모습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의 꼴이 웃기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더군다나 J는 여전히 카드빚을 다 갚지 못했으면서 또 다른 카드로 성형수술 금액을 결제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가본 그의 집에서 뜯지 않은 택배 상자와 곰팡이가 피다 못해 삭아버린 변기 뚜껑 같은 것들이 보였다. 내가 애틋하게 그리워했던 포근한 그의 집, 우리가 사랑을 키워갔던 그 작은 집은 쇼핑중독으로 물건이 넘쳐나고 관리 소홀로 곳곳에 곰팡이가 피고 있었다.
맑은 정신과 맑은 눈으로 다시 본 그 사람은 너무 초라한 사람이었다. 내 우울증은 그에게 어떤 환상을 덧씌워 놓았던 걸까? 남은 일말의 미련까지 말끔하게 지워준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 몇 번 더 그가 메시지를 보내면 답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했다. 그는 어떤 날은 잘 지내냐고 물었고, 어떤 날은 우리가 데이트했던 돈가스집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고, 내 생일에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정작 그와 사귀고 있었을 때는 내 생일을 잊어버려서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처음엔 그가 나에게 매달리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들뜨기도 했다. 이번엔 내가 우위에 있는 게임을 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이내 '다시 내가 J가 펼쳐놓은 게임판에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내 인생에서 완전히 밀어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전화를 걸고 '나는 그동안 너와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기 때문에 우리 관계가 좋아질 거란 희망이 전혀 없고 앞으로는 나에게 전화하지 말아 달라'라고 상냥하게 말했다. J가 또 '언젠가 우연히 만나게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지만 난 다시는 그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다.
'여기가 마침표구나. 이젠 정말 끝이다.'
전화를 끊고 잠깐 눈물을 흘렸다. 남은 감정을 다 배설하는 듯한 후련함과 해방감이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렇게 눈물을 닦고 가족들과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고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와 헤어진 나에게는 소중한 가족과 평안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예전에 썼던 일기장을 들춰봤습니다. 2018년 11월 1일 일기에 제가 '인간관계를 주제로 글을 써봐야겠다'라고 써놨더군요. 그 생각의 씨앗이 여러 편의 글로 자라기까지 3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네요.
너무 힘들고 외롭고 슬펐던 기억들이 흐려질 만큼 지금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부끄러운 연애사를 밝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경험으로 제가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글 속에 잘 녹아들어 있어서 보시는 분들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여기까지 우울증에 대한 글은 묶어서 조만간 브런치 북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