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전상서(前上書)

늦게 자라는 딸이 아버지께 올리는 글

by 구름조각

나의 아버지는 가끔 놀라운 말을 하신다. 어제저녁 식사에는 무려 앞으로 당신은 아내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선언하셨다. 무슨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대사도 아니고 '내 여생은 당신을 위해 살겠다'니. 우리 엄마는 어디서 저런 남편을 골랐는지 신통방통하고 나는 왜 그 남자 보는 눈을 물려받지 못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내가 고른 남자들은 다 지뢰 같아서 발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엄마는 첫 연애 상대와 결혼해서 30년 넘게 살다 양갈비 집에서 남은 여생은 당신을 위해 바치겠다는 두 번째 프러포즈도 들었다. 장소 선택만 빼면 퍼펙트하다.


그러면서도 나와 동생에게는 너희의 인생을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부모를 걱정하지 말고 너희 인생을 챙기라는 말. 아버지의 능력으로 받쳐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그동안 얼른 자립할 수 있게 서두르라는 말. 어서 떠나라는 말에도 애정이 가득해서 왠지 눈물이 났다. 술 취해서 양갈비 집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역시 장소 선택만 빼면 퍼펙트하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일찍 죽겠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게 나와 동생 모두에게 어린 시절의 상처로 남았는데 그 때는 아버지가 언제든 우리를 버리고 떠나겠다는 으름장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게 나중에서야 아파서 골골대며 자식들을 병간호로 고생시키지 않고 깔끔하게 생을 정리하고 싶다는 뜻이었다는 걸 알았다. 부담 주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도 달가운 다짐은 아니다.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고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고 누군가의 아들로 살면서 당신의 삶은 어디로 가는지... 그런 건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처럼 말하신다. 가족들을 지키는데 평생을 바치고도 늙어서 죽을 때까지 조금도 기대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이 서운하고 그만큼 자식들이 미덥지 못하다는 말로 들려 죄스럽기도 하다. 우리 부모님의 자식 농사는 투자 대비 수익이 현저히 낮은 것 같다.


나와 아버지는 서로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초보 아빠 시절 나에게 잘 대해주지 못한 것으로 죄책감을 안고 있고, 나는 사춘기 시절에 아버지를 원망했던 것을 죄책감으로 안고 있다. 우리 부녀가 그다지 살갑지 못한 것은 서로에게 가진 죄책감을 만회하려 애쓰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늘 서로 조심하고 묘하게 긴장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내가 지난 날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애를 쓴 것이 아버지 눈에는 딸애가 영 눈치 보고 주눅 든 것으로 보였는지, 이제는 당신에게 잘해주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신다.


살면서 다시 이렇게 풍요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을까 싶다. 내 남은 삶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을 날이 며칠이나 남았을지 헤아려 본다. '내가 부모가 되면 저렇게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는 내 삶 하나 건지지 못해 아등바등인데 아버지는 4명의 사람을 지켜내다니, 누가 이들에게 평범한 아저씨라는 말을 하겠는가. 한 집안의 가장들이란 남녀노소 불문하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때가 되면 당연히 떠나야 했을 내가 아직까지 부모 그늘에 기대고 있는 건 여기가 평온해서 그렇다. 바깥세상은 너무 험난하여 선뜻 그 전장에 서기가 두려운 것이다. 내가 가야 할 곳도 모르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게 버거워서 안락한 가족들에게 도망쳐 온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시다가 다 큰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새처럼 모질지도 못하여, 이제는 부모 걱정 말고 너의 인생을 살고 당신께서 버틸 수 있는 동안 필요한 것은 다 얻어 가라 하신다.


나도 이제는 정말 둥지를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이 감정을 기록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이 글을 꺼내 봐야겠다. 내가 얼마나 귀한 딸인지를 곱씹어 보며 하루 또 버텨내고 나 자신을 아껴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아 따뜻한 가정에서 보호받고 넘치는 부모의 사랑받고 자랐는지도 잊지 말아야겠다.


문득 떠오른 기억이,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타로카드집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카드를 뽑은 적이 있다. 그때 가을의 붉은 단풍 나무가 그려진 카드를 뽑았다. 여러 상징이 같이 그려져 있었지만 디테일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아서 그 사장님이 전해준 신비로운 해석만 기억하고 있다.


너의 아버지는 이미 성숙한 영혼으로 이 땅에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야.


우리의 영혼이 이 땅에서 배울 것이 있어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나의 아버지는 더 배울 것이 없음에도 이 땅에 와서 가지에 잔뜩 열린 열매만 나눠주고 가는 사람인가.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잔뜩 배불리 먹이고 홀연히 떠날 운명을 가진 사람인가. 인간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면 나의 아버지는 이번 생을 끝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영혼인 것이다. 인간으로 해야할 일을 다 하고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겠지...아직 치기어린 나는 배울 것이 많아 몇번은 더 이 생애의 고통을 겪게 될 테지만, 이번 생은 저승까지 가져갈 아름다운 기억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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