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L의 사랑, 첫 번째
1. 내 엄마와 내 아빠의 연애 이야기
P는 65년생 남자이고 딸과 아들의 아버지이다.
P는 형과 막내 여동생 사이의 둘째이고 어린 시절 장난을 많이 치는 골목대장이었다. 알게 모르게 장남을 더 이뻐라 하는 어머니에게 은근히 소외감을 느꼈다. 그런 어린 시절의 P의 편에 서준 것은 아버지였다. 1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지독한 가난을 겪은 P는 조금 일찍 어른이 되었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새벽부터 야채장사를 다니는 어머니는 끼니를 챙기는 것도 빠듯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끓여 놓고 나간 불어 터진 수제비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 지긋지긋한 기억 탓에 P는 아직도 수제비와 불어 터진 국수를 싫어한다.
철든 후부터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또 잘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느끼지 못하는 안정감은 친구들 사이에서 채웠다. 고등학교에서 산악회에 들어 주말마다 산을 오르며 체력을 키우고 친구들을 만들었다. P는 그 시절 키워놓은 체력과 맺은 친구와의 연으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왔다.
L은 67년생 여자이고 딸과 아들의 어머니이다.
L은 6남매 중 장녀다. 어린 시절에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어머니가 시장에 간 사이 동생들을 업어 키워야 했다. 키가 작은 L은 그때 동생을 좀 덜 업었더라면 조금은 더 자라지 않았을까 항상 아쉬워한다.
L은 공부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손재주가 좋았다. 그림도 곧잘 그리고 음식도 맛들어지게 만들 수 있다. 빨리 달리기는 못해도 오래 달리기는 잘해서 체력장에 남들이 다 나가떨어지도록 혼자 달리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몸집이 작아도 꾸준히 산을 오르는 등산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L은 제 나이보다 2살 많은 P를 고교 연합 산악회에서 처음 봤다. P는 남고 산악부장이었고, 공부도 잘했고, 친구도 많고, 호탕하게 잘 웃는 사람이었다. L이 P를 처음 봤을 때, '등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고 말한 건 나만 아는 비밀이다. L은 자기의 인연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먼저 반한 쪽은 L이다.
사람은 종종 자기가 반하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괜히 투덜거리는 말이나 뾰로통한 표정으로 서툴게 관심을 표현했다. P는 키는 쬐깐한데 쉽게 기죽지 않는 L을 자주 놀렸다. L은 지지 않고 '지가 선배면 다냐!'라고 받아쳤다. 이 싸움은 두 아이를 낳고 30년째 사는 동안 계속되고 있다. P는 아직도 L이 셈법에 느린 것을 놀리고, 그때마다 L은 참지 않고 발끈한다.
P가 먼저 대학에 갔다.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국립대 금속공학과에 진학해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L은 본인의 손재주를 살려 고3 때 미술로 진로를 선택해, 여대에 서양미술학과로 진학했다. 입시에 정신없이 살다 대학에 가고서야 동창회 모임에서 둘은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먼저 반한 쪽은 L이었다. L은 그날 술자리에서 유난히 P의 웃음소리가 귀에 꽂혔다고 말했다. '저 사람 목소리가 저렇게 좋았나?'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날부터 L은 수업이 끝나면 P의 학교 주변을 배회했다. 마침 L이 살던 동네는 P가 다니는 대학교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게 학교 번화가 주변을 배회하다 보면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우르르 모여 술을 마시러 가는 P와 만날 수 있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함께 술도 마시고 밥도 먹었다. 그러다 어느 날 단 둘이서 남게 된 술자리에서 L이 먼저 고백했다.
내가 선배 좋아하는 거 알아?
그럼 뭐, 사귀든가.
그렇게 1일이 되었다.
잠자리 안경을 낀 전형적인 공대생인 P와 김완선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미대생 L의 조합은 모두에게 신선했다. L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봐 왔던 P와 사귄다는 걸 믿지 못했다.
그 선배 무뚝뚝하고 재미없고, 술이나 많이 마시는 선배인데?
L의 취향은 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첫 데이트부터 조금 삐걱거렸다. 삐삐도 없던 시절, 약속 장소는 항상 시내의 큰 서점이었다. L이 예쁘게 차려입고 서점에 가면, P가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끼고 책을 보고 있었다. P는 다방에 앉으면 커피를 원샷하는 사람이었다. L은 서점에 서서 책을 읽는 P를 이해 못했고, P는 비싼 다방에서 시간이나 보내는 L을 이해 못 했다. 서점-다방-영화관-식당-집 코스의 데이트는 거의 매번 비슷했다.
서점-영화관-식당-다방-집
서점-식당-다방-영화관-집
어쩌다 술이라도 한잔 하려면 P의 선배들과 우르르 모여서 술집에 갔다. 가난한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에 맞는 허름한 술집과 매캐한 담배연기, 술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 덩그러니 L이 앉아 있곤 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L은 자신이 없어졌다. 자기만 P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저 고백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매번 비슷한 데이트에 왠지 단 둘이 있는 것도 서먹한 느낌이다. P는 나와 둘이 있을 때보다 선배들과 술을 마시는 게 더 즐거워 보였다. L에게는 집에 가면 데이트 어땠냐고 물어보는 여동생들이 있었다. 즐거웠다고, 좋았다고 대답하는 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