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집에서 김치 담그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져서 작년에도 저희 식구 먹을 양만 간단하게 담았어요. 예전처럼 대가족이 모여 김장하고 다 같이 수육을 나눠먹는 풍경은 찾기 힘들게 되었죠. 4인 가족인 저희 집에는 일치감치 김치가 떨어져서 지금은 간단한 총각김치나 오이김치 등을 담아서 먹고 있습니다.
산뜻한 봄, 여름 채소로 담은 김치도 맛있지만 가끔 콤콤하고 시큼한 묵은지가 필요해요. 김치는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다른 요리의 재료로도 중요하니까요. 김치전,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등 한국인의 소울푸드는 다 담당하는 올라운더 같은 식재료죠. 김치 넣고 끓인 라면도 너무 맛있잖아요? 다들 아는 맛이라 입에 침이 고이실 것 같아요.
며칠 전에 외할머니께 김치를 몇 포기 얻어왔습니다. 저희 친가는 젓갈을 적게 넣어서 시원하고 깔끔한 김치를 주로 담으세요. 그래서 물김치나 겉절이 같은 게 아주 맛있어요. 반대로 저희 외할머니는 젓갈도 듬뿍, 매운 고춧가루도 듬뿍 넣어 김칫소를 만드세요. 처음에 먹을 때는 짜고 매운맛이 강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감칠맛이 올라오는 김치가 됩니다. 이런 김치가 찌개, 찜 같은 푹 끓여야 하는 요리에 적합한 것 같아요.
이 귀한 묵은지로 뭘 맛있게 해 볼까 하다가 재료의 참맛을 살리는 김치찜을 하기로 했습니다. 고기도 맛있는 통삼겹살을 넣고 만들면 밥도둑이 따로 없겠죠.
저는 요리를 할 때 재료의 핵심인 필수 재료와 부재료를 구분해서 무엇이 더 우선순위인 재료인지 파악해요. 김치찜의 메인은 김치이고 고기는 기름진 맛을 더해주는 서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치와 고기를 함께 푹 끓이면 고기가 부드러워질 동안 김치가 너무 흐물텅 해지는 게 싫어요. 맛있는 김치가 너무 익어서 녹아버릴 정도가 되면 아깝잖아요. 적당히 아삭한 맛이 있어야죠.
그리고 삼겹살은 고기 자체는 맛있지만 기름이 너무 많아서 결과적으로 김치찜의 맛이 느끼해지더라고요. 그 기름진 맛을 피하려 앞다리살이나 목살을 써보기도 했지만 고기가 퍽퍽한 게 아쉬웠어요. 역시 쫄깃하고 부드러운 삼겹살을 넣은 김치찜이 제일 맛있지만, 거기서 돼지기름만 약간 걷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 먼저 삼겹살을 에어프라이어로 익혀 기름을 녹여낸 다음 김치찜에 넣고 끓이는 거예요. 제가 생각해도 기발한 것 같은데 될지 안될지는 직접 해봐야겠죠?
맛있는 묵은지와 삼겹살을 600g 준비하세요. 정육점에서 고기 받으실 때 삼겹살 지방에 칼집 내어 달라고 부탁하세요. 집에서 쓰는 칼로는 미끄러운 지방이 잘 썰리지 않더라고요. 소금을 조금 뿌려두고 다른 재료를 준비합니다. 양파는 반에 반 정도 채 썰어 준비하시고, 대파는 어슷썰기 하고, 청양고추 2개 썰어 줬어요. 이번에 산 청양고추가 별로 맵지 않아서 두 개 썰었는데 매운맛을 싫어하시면 청양고추를 빼고 양파를 더 넣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부재료는 상황에 따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재료라서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하실 수 있어요.
삼겹살을 비계가 위로 가게 에어 프라이기에 넣고 180℃에 15분 정도 익혀줍니다. 칼집을 내면 기름이 더 잘 스며 나와서 꺼내보면 기름이 잔뜩 고여있고 비계 부분이 까상까상하게 익었을 거예요.
에어 프라이기가 5분 남긴 시점에 냄비에 쌀뜨물을 올려서 끓여 주세요. 그리고 표고버섯 밑동을 잘게 다져서 쌀뜨물에 넣고 끓여줍니다. 표고버섯이나 다시마는 천연 MSG라서 이렇게 찜 요리에 잘게 다져서 넣으면 감칠맛이 많이 나요. 국물을 우려서 쓰기도 하던데 국물 우리고 버리는 것도 왠지 아까우니 남김없이 먹게 다져서 넣습니다. 집에 표고버섯 가루나 새우가루가 있다면 그걸 사용하셔도 좋겠죠?
표고를 넣은 쌀뜨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그때 김치를 세로로 길게 찢어 냄비에 넣고 끓여줍니다. 이때쯤에 아마 에어 프라이기에서 띵~소리가 났을 거예요. 고기 부분이 김치 국물에 잠기게 넣고 끓이면서 새우젓 한 스푼과 다진 마늘 한 스푼, 다진 생강을 넣어서 푹 끓여줍니다. 아 설탕과 매실청을 넣어서 단맛을 내주세요. 단맛이 조금은 있어야 묵은지의 시큼한 맛이 균형을 잡더라고요.
한소끔 끓고 나면 준비한 채소를 넣고 맛을 봅니다. 간을 추가해야 한다면 액상 치킨스톡이나 소금, 새우젓을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김치찜에 간장이 들어가면 맛이 조금 튀는 것 같더라고요. 김치를 담을 때 젓갈과 소금을 사용하는데 간장의 짠맛과는 약간 결이 다르니, 소금이나 젓갈로 김치의 맛을 살려주는 깔끔한 양념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10분 정도 더 약불에서 끓여 주고 한 김 식힌 다음 보기 좋게 담아서 통깨와 초록 파를 쫑쫑 썰어서 올려주세요. 빨간 김치찜에 화룡점정으로 초록파가 올라가면 색감이 예쁘답니다.
김치찜엔 흰쌀밥이 빠질 수 없죠. 여기에 시원한 국물 후루룩 들이키게 맑은 콩나물 뭇국을 곁들였습니다. 다른 반찬 필요 없을 정도로 정말 맛있었어요. 다 익은 삼겹살이 얼마나 보드라운지 아삭함이 남은 김치 잎에 말아서 한입 먹으니까 밥이 술술 들어가요.
동생과 같이 김치찜 한 상 든든하게 먹고 정리하자마자 늦게 퇴근하신 엄마가 배고프다며 오시네요. 급한 대로 다시 데운 김치찜에 밥만 놓고도 한 그릇 뚝딱 드셨어요. 엄마가 식사를 끝내고 나니 회식하고 오신 아빠가 김치찜 냄새에 군침을 흘리셨어요. 이미 곱창전골에 소주도 잔뜩 드셨으면서도 김치찜 냄새가 워낙 유혹적이니까요.
그날 밤은 식욕을 꾹 참고 다음날 아침에 김치와 고기를 잘게 가위로 썰고 김가루 뿌리고, 참기름 살짝 둘러 김치찜 국물 넣고 싹싹 비벼 먹었습니다. 마치 농축된 김치찌개를 먹는 것 같아요. 국물 아까운데 밥 한번 더 볶아먹을까 싶다가도 이쯤에서 보내주는 게 음식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기도 한 것 같고요.
집에 맛있는 묵은지 있으시면 꼭 에어 프라이기 이용하셔서 맛있고 색다른 김치찜 해보세요. 아는 맛이 제일 무서운 법인데 글만 읽어도 침샘이 뻐근하실 걸요? 김치찜 드실 때까지는 계속 눈 앞에 아른거리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