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빈곤한 인간관계가 추천해주는 친구 목록은 다 고만고만하다. 과거의 사람들, 이미 더 이상 아무 친밀감도 없는 그들을 다시 친구로 만나야 하다니. 내가 아무리 에세이 홍보에 급급해도 이런 연락은 좀 꺼려진다.
왜 가까운 사람을 더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다. 처음 본 사람과는 조잘조잘 잘도 떠들면서 왜 항상 가까이 있는 누군가는 어렵게 느껴지는지... 설명하게 위해 나의 인간관계를 3개의 원으로 나눠보자. 나와 가장 가까운 원에는 가족이 있다. 그리고 이 가족은 내 부모님, 동생, 고양이뿐이다. 친인척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도 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가족의 가족인, 2차 가족의 느낌이라 당연히 명절날이 즐겁지 않다.
두 번째 원에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내 친구는 정말 친하고 오래 지낸 사람들을 친구라고 말하기 때문에 소수의 몇명을 제외하면 지인에 가깝다. 그리고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택시기사 아저씨, 시장 아주머니들-들을 3번째 원에 넣는다면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편안한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친밀감과 함께 보낸 시간이라는 X축 Y축을 두고 4개의 영역이 있는 매트릭스를 그렸다. 가장 친밀감도 높고 같이 보낸 시간도 많은 친구(B그룹)는 대학에서 만난 친구 2명뿐이고, 친밀감이 없이 보낸 시간만 많은 친구들도 있다.(A그룹) 이제는 만나면 좀 어색한 중학교 때 친구들이 그런데 어렸을 때는 그렇게 붙어 다녔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서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만나면 어릴 때처럼 유치하게 놀기도 하지만 묘하게 나에게는 조금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
이거 설명하려고 그림판 켰는데 3D 그래픽 지원이 돼서 깜짝 놀랐다. 세상이 좋아졌어요...
한때는 '친구들 사이에도 권태기라는 게 있나?' 하는 고민이 들 만큼 알아온 세월이 무색하게 왠지 그들이 멀게 느껴진다. 이런 관계를 졸업앨범에 비유하고 싶다. 졸업앨범은 평소엔 들춰보지도 않지만 가끔 보면 옛날 생각에 반갑고, 두꺼워서 둘 곳도 마땅찮지만 막상 버리기엔 아까운 것이다. 그런 정든 애물단지 같은 졸업앨범처럼 옛 친구들도 만났을 땐 어린 시절 추억 때문에 반갑지만 조금만 대화를 나눠보면 서로 너무 달라져 있고, 연을 끊기에는 함께 한 시간이 아깝지만 자주 만나기는 불편하다. 먼지처럼 시간만 뽀얗게 내려앉은 친구 관계이다.
반대로 만난 시간은 짧지만 친밀감은 높은 친구(C그룹)들도 있는데 직장에서 만난 또래들이 그렇다. 아무래도 매일같이 만나서 8시간씩 얼굴 보면 정이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이런 관계는 서로 조금의 예의를 지켜가기 때문에 관계가 틀어질 일이 적고, 공통의 대화 주제가 있어서 대화를 하기에도 수월한 것 같다. 그렇지만 퇴사 후에도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것 같고 서로 사는 게 바빠서 자주 보지도 못한다.
친밀하지도 않고 함께 보낸 시간도 없는 D그룹의 사람들을 페이스북에서 볼 때가 제일 난감하다. 이제는 안 나가는 동아리나 동호회 활동에서 번호 교환한 사람들 정도의 느낌이라, 사진을 보고도 한참 '이게 누군가? 내가 이 사람을 언제 만났지?' 기억을 더듬어 봐야 한다. 그리고 이 D그룹에 속해 있던 사람이 내 첫사랑이다.
대학 연합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그와 나는 다른 학교였다. 그 사람 외모는 솔직히 좀 재미없는 교회 오빠 느낌인데 기타를 치는 모습에 반했다. 예전에 음악 에세이에도 쓴 적 있지만 난 기타를 치는 남자가 이상형이라 늘 가산점 30점은 주고 시작한다. 근데 당시에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라 꾸밀 줄도 몰랐고 미모(?)가 완성되기 전이었다. 그러니 뭐 고백할 용기도 없고 혼자 짝사랑을 했지만, 속내가 빤히 보이는 나는 몰래 하는 짝사랑 따위 할 수가 없다. 아마 나만 몰래 하는 짝사랑이어서 동아리 사람과 당사자도 다 알았을 것이다.
사실 짝사랑 자체가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차피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면 시원하게 고백하고 깨끗하게 정리하자는 마음에 고백을 질러버렸다. 이뤄질 수 없는 마음에 전전긍긍하는 게 싫어서 차라리 이 감정을 끝내고 해방감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뭐 결과는... 시원하게 차였다.
그날 저녁에 자려고 누웠더니 왠지 내 처지가 처량해서 훌쩍훌쩍 눈물이 났다. 그 소리에 엄마가 자다 깨서는 "너 왜 울어?" 물었고, 나는 "남자한테 차였어."라며 찌질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한밤중에 이불킥 감인 기억이다. 엄마는 내 등을 쓸어주며 얼른 다시 자라고 토닥여 줬다. "어이구... 누가 우리 딸을 찼어?" 등을 쓸어주는 엄마의 손길에도 쉽게 잠들 수 없어서 뒤척였다. 울어서 코는 막혔고 이미 잠이 다 달아난 후였다.
엄마는 이내 내가 잠들지 못한다는 걸 알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잠이 안 와?"
"응... 못 자겠어."
그러자 엄마는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안 잘 거면 일어나서 동생 아침밥이나 차려."
띵띵 부은 눈으로 만둣국을 끓이는 나를 보고 고등학생이던 동생은 어떻게 이 시간에 일어났냐고 놀라워했다. 나는 담담히 "누나 남자한테 차였다."며 만둣국 한 그릇을 내밀었고 동생은 그저 "오오, 눈물 젖은 만둣국 잘 먹을게." 라며 맛있게 먹을 뿐이었다.
첫사랑의 쓰린 실패는 생각보다 빨리 잊혔다. 가족들에게 숨김없이 말하고 신나게 놀림받은 덕인지 생각보다 금세 회복한 것이다. 그 오빠는 다시 만날 일이 없어서 완전히 기억 속에서 지워진 줄 알았다. 그런데 페북에서 그 얼굴을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 사람 번호도 없는데 어떻게 친구 추가에 뜬 건지?
다시 보면 얼굴도 내 취향이 아니고, 딱히 기타 치는 거 말고는 매력도 없는데 내가 왜 그를 짝사랑한 건지 의문이다. 그때 당시에 내가 느끼던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이었던 걸까? 어차피 지금 생각해봤자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지.
어쨌든 페북에서 첫사랑을 만나고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적어봤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심하게, 내 감정을 다루는데 서툴러서 마냥 저돌적인 고백을 했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에게 휙 던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고백이 그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한 일이었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보려 했지만 관둬야겠다. 또 흑역사를 만들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