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0살 이후부터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어요. 그렇다보니 4살 터울의 남동생의 저녁식사를 챙기는 건 제 몫이 되었는데, 어릴때는 그렇게 동생을 챙기는게 아주 짜증나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제 동생은 입도 짧고 먹는 양도 많지 않은 주제에 은근히 음식을 가려요. 뭐 하나 해주면 맛있다고 먹는 일이 없으니 밥을 챙겨준 보람도 느끼기 힘들죠. 그런데도 화를 벌컥 내기 어려운 게 요 녀석이 천식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진짜 몸이 약하고 아프니까 입맛이 없던 거라 안쓰럽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하고, 이래저래 신경쓰게 만들었죠.
처음부터 요리를 잘했던게 아니고 잘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네요. 매일 저녁 어떻게든 그럴듯한 한끼를 해 먹어야 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레시피를 묻고 혼자 해보면서 자연스럽게 요리 실력이 늘었어요. 정확한 레시피에 신경쓰지 않는 것은 그때의 버릇때문이죠. 엄마가 읊어주는 레시피를 듣고 내 머릿속에서 맛을 상상하면서 괜찮은 맛을 찾아가야 했거든요.
간을 보면서 '무슨 맛이 부족한 걸까?'
너무 매운맛이 강할 때는 '뭘 넣어야 매운맛이 중화가 될까?'
찌개를 끓이면서 '언제까지 끓여야 적당한 농도가 될까?'
이런 걸 생각하면서 스스로 나름의 방법을 찾아갔어요. 그렇게 하루 이틀 실력이 쌓이니까 어느날 제 동생이 별명을 지어주더라구요. "누나는 볶음요리 장인이야." 그게 무슨 뜻이냐면 프라이팬에 아무거나 넣고 볶아도 그럴싸한,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든다는 거예요. 근데 이 자식이 끝까지 맛있다고는 안 하고 그럴싸하고 먹을만하다니...이 눈치 없는 놈은 미래의 부인에게 사랑받기는 글러 먹었죠?
그래도 칭찬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좀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라구요. 장인 정신을 담아서 더 맛있는 볶음요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각종 양념과 재료를 섭렵한 결과, 이젠 진짜 냉장고에 아무 재료나 꺼내면 후다닥 한그릇 요리를 만들수 있게 되었어요. 냉장고를 스캔해서 대충 재료를 훑어보면 뭐랑 뭘 넣어서 무슨 소스를 넣으면 어떤 맛이 되겠다고 머릿속에 그려요. 이젠 뭐... 거의 장금이가 따로 없네요.
장보러 가는 것도 귀찮은 김에 냉장고를 열어서 뭐 쓸만한게 없나 찾아봅니다. 저번에 마라탕 먹고 남은 메추리알이 한줌정도 남아있고, 1+1행사로 샀던 후랑크 소세지가 4개 남았고, 버터 치킨 커리할 때 썻던 생크림도 반정도 남았네요. 생각보다 오래 된 것 같은데...열어서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크게 이상한 냄새는 안 나니까 그냥 써야 겠어요. 노란 파프리카도 한개, 늘 있는 양파와 마늘도 꺼내고, 냉장고 한켠에 잠들어 있던 불닭소스도 꺼냈어요. 이제 재료를 다 찹찹 썰어줘야 겠죠?
양파와 파프리카를 잘게 채썰어서 버터 한 조각 넣고 볶아줍니다. 버터도 이게 끝이라서 내일은 진짜 장보러 가야겠어요. 소시지도 어슷썰어 팬에 넣고 다진 마늘도 반숟갈 정도 넣어주세요. 여기서 기본적인 소금간을 해야겠죠? 반쯤 남은 생크림의 종이팩을 열어서 안에 노른자 두개를 까 넣어 줍니다. 남은 흰자는 모아놨다가 내일 오믈렛 해먹으면 되겠어요. 제가 넋놓고 있다가 계란을 설거지통에 깠지 뭐예요? 아까운 계란 하나가 하수구로 흘러 갔는데 참...껌하나 까서 껌종이를 입에 넣고 껌을 쓰레기통에 버린 격이네요.
생크림에 계란 노른자 2개 넣어 풀어주고 거기에 불닭소스 3숟갈 정도 넣었어요. 그동안 양파, 파프리카, 소시지가 노릇하게 구워질 동안 잘 볶아주세요. 잘 섞인 소스를 붓고 끓이면서 부족한 간을 소금으로 추가하세요. 저는 냉장고에 파마산 치즈가루가 있길래 한스푼 정도 넣었어요. 파스타 면만 삶아서 살짝 볶아주면 불닭크림소세지파스타가 되겠죠? 근데 오늘은 냉장고 털이용이니까 남은 메추리 알 넣고 후추 탈탈 뿌려 뒤적뒤적 해줍니다. 메추리알은 다 익었으니까 굳이 더 익힐 필요 없어요. 그리고 후추는 순후추보다 굵게 간 검은 후추가 더 나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파슬리 가루 살짝 뿌려 데코해주면 끝입니다.
드셔보시면 먹어본 것 같으면서도 처음 먹어보는 맛이 느껴지실 겁니다. 크림 불닭은 라면으로도 나와서 익숙한데 여기에 노른자를 넣어서 고소한 맛이 더 강해요. 밥이랑 먹어도 큰 위화감이 없는 맛이지만 페투치니 같은 넓적한 파스타 면이 더 잘맞을 것 같긴 해요.
볶음 요리를 잘 하는 비결은 재료를 다 비슷한 크기로 썰고, 양념 재료를 미리 준비했다가 센불에 빠르게 볶는 거예요. 재료를 볶는 중에 양념을 하나씩 넣다보면 금새 타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하고 모든 재료를 순차적으로 넣어 모든 재료가 적절하게 익게 만드는 거죠. 파프리카를 넣어도 단맛이 나게 만들고 싶으면 일찍 팬에 넣어서 잘 익게 두시고 아삭한 맛을 즐기고 싶으면 나중에 팬에 넣어 살짝만 익게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