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조각 Apr 26. 2021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그리고 그 모든 게 뒤섞여 있는 우리의 사랑

    『채식주의자』로 유명한 소설가 한강의 산문집「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나에게 오랜 여운을 남긴 그 문장은 사랑에 대한 일종의 내적 기준이 되었다. 이별 없는 사랑, 배신 없는 사랑, 질투 없는 사랑에 대한 기대. 그래서 좋지 못한 감정은 지워내고 온전히 사랑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소유욕은 사람을 너무 숨 막히게 하니까 덜어 내고,

집착은 사람을 구차하게 만드니까 빼고,

갈등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니까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서도 서로 선을 지키려고 했고, 너무 힘든 일은 말하지 않으려고 했고, 신경 쓰이는 일에도 입을 다물고, 지겨운 감정싸움보다 깔끔한 이별을 선택했다. 나는 그게 나의 사랑을 그저 예쁘게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쁜 감정은 빼고 좋은 것만 남긴 사랑은 맹숭맹숭하기만 했다. 마치 설탕의 단맛만 남기고 싶어서 소금을 뺀 케이크처럼 사랑의 달콤함도 지워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차피 사랑이란 봄날의 피고 지는 벚꽃처럼, 아름답게 피었다 때가 되면 자연히 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꽃이 지는데 화를 내어봤자 떨어지는 꽃잎을 붙잡겠는가, 미련을 가지고 서성대어 봤자 앙상한 가지과 바에 짓이겨진 흔적들만 보겠지. 그렇다면 서로 예쁜 추억만 가지고 있을 때 깔끔하게 보내주면 좋겠다.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추해지지 말고, 끝난 인연 애써 붙잡지 말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안녕을 말하자고. 


    그렇게 쉽게 떠나보내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 보니 내 연애는 1년을 채 넘기기 힘들었고 늘 내가 먼저 이별을 결정했다. 뜨거운 감정이 식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미적대는 게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먼저 자리를 뜨고 나면 덜 식은 마음으로 오래 그리워한 건 내쪽이다. 되려 상대방은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빨리 새 출발을 한 반면 나만 오래 실패한 사랑의 기억을 곱씹는 것이다.


    언제나 사랑의 의미가 뭔지 알고 싶었다. 누가 나에게 사랑이 이런 거라고 보여주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게 아파도 나 자신을 전부 던져도 될 만큼 가치있는 일이라고 설득해주면 좋다. 그런데 일단 주변의 사랑들은 다들 뭔가 부족해 보였기 때문에, 난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종교인, 철학자들의 말 속에서 길을 찾으려 했다. 현명한 사람들에게 내가 찾는 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랑은 끝없이 희생하는 거라 말하고, 누군가는 분별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 한다. 사랑은 온유하고 자랑치 않으며 교만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랑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애착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사랑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성적인 끌림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라 하고 누군가는 상대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사랑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사랑의 정의가 존재하는 것일까.

너무 많은 말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현학적인 질문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다. 철학과 종교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과학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과학자들은 사랑을 중독이라고 말한다. 호르몬의 작용이고 유전적인 명령에 의한 성적 결합이라고 말한다. 처음 사랑에 빠지면 도파민과 같은 쾌락 호르몬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옥시토신 같은 애착 호르몬이 나오지만 이 모든 화학 작용의 유효기간은 3년뿐이다. 과학자들은 커플들이 이혼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가 결혼 후 3년째 될 때라는 통계자료를 가져오며 나를 설득시킨다. 사랑은 화학적, 신체적, 유전적, 기계적인 반응일 뿐이며 그 유효기간이 짧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게 신체의 기계적인 작용일 뿐이라면, 왜 나의 영혼은 이렇게 사랑에 목마른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에게도 사랑이 복잡하다. 애착 이론은 부모와 자녀의 애착관계를 성인이 된 후 연인과의 관계에서 반복한다는 주장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숨겨진 리비도에 의해 성적인 끌림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섹스와 사랑은 다르지 않을까? 그러면 나의 부모가 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기엔 내가 받은 건 많은 것 같은데. 부모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생각은 무한할지 몰라도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자기의 목숨이 위협받아도 자녀를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희생할 준비가 되어야만 부모가 될 수 있나. 그러면 부모의 기준은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보다 위대한 것이다. 하느님은 말 안 듣는 자녀는 지옥으로 보내기도 하는데, 하느님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고 그의 사랑은 믿음을 건 조건부 사랑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건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질문이 계속 이어지는 건 내 안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랑에 대한 이렇게 많은 혼란과 정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는 이름 붙이고 정의 내리기에 따라 수천 수만 가지의 의미가 생기니까. 허구의 이야기 같은 것이라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의미와 사연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죽기 전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나에게는 이 삶이 나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긴 수업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은 원래 쉽게 변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