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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Aug 02. 2021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 순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대학 시절 전공은 건축 관련이었지만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교수님은 서양미술사를 강의하셨던 불어학과 교수님이셨다.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셨고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었다. 그분의 강의가 인상 깊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매번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강의하셨던 그 태도 때문이었다.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주로 학생들에게 태도 점수를 매기지만 학생들도 교수의 태도를 점수 매기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적잖은 등록금을 내고도 타성에 젖어 무기력한 강의를 듣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강단에 설 때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전달할지에 대한 고민은 하고 오면 좋겠다. 한 교수의 강의를 두세 번만 들어도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보고 등록금이 아까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배운지식이 그렇다고 항변해도 성의 없이 강의에 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끼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매번 손수건이 흠뻑 젖을 정도로 열정적인 강의를 하신 교수님을 보면 그 열정에 감화될 수밖에 없다. 그의 열정은 예술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낭만사랑사람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나는 그 강의를 정말 좋아했다. 건축학 대학 건물에서 출발해 커다란 캠퍼스를 가로질러서 강의실에 찾아가려면 15분이 부족해 매번 달리듯이 걸어야 했지만, 그런 수고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맥락이 나온지는 모르겠다. 아마 뒤샹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던 날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강의 중에 교수님이 잠깐 말을 멈추시고 한참 뜸을 들이셨다. 속으로 '이걸 말해도 될까, 말까.' 고민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을 한번 쭉 둘러보시더니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너희는 뭘 할 거냐?    


    학생들은 오래 침묵을 지켰다. 강의에 참여할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이 너무 깊고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열심히 손을 들고 대답하던 나도 왠지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뭘 하냐고? 너무 철학적인 질문인데?' 늘 현재에 충실하면서 살자는 게 모토인 나에게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한 학생은 "평소 하던 대로 일상적으로 살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님은 "너는 스피노자구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한그루 심겠다는 거지?"라고 유쾌하게 받아주셨다. 


    다른 학생은 "가족들과 있을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교수님은 "왜 가족들이랑 끌어안고 기도라도 하게?"라고 그 학생을 놀리셨다. 다들 웃음이 터졌다. 가족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곤 하지만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가족끼리 멀뚱히 얼굴을 보고 뭘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 남학생이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나도 같은 심경이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이 뉴스에서 들린다면,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소행성과 충돌을 앞두고 있다거나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온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너무 막막할 것 같은데...?


    교수님은 잠시 뜸을 들이시더니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사랑을 나눌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내일 당장 지구가 망한다는데 사과나무를 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니? 가족들이랑 있어서 뭐하게? 나는 뜨겁게 사랑을 나누다가 죽을 거야." 사랑을 나누겠다는 교수님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말이 나에게는 섹스를 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볼뽀뽀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질펀하게 섹스나 하고 말지.  


  

왼쪽: 영화 폼페이 오른쪽 : 폼페이의 연인 화석 사진

    이후에 화산 폭발로 멸망해 버린 폼페이에 대한 영화를 보다가 문득 교수님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오래전 다큐멘터리에서 본 폼페이의 연인 화석이 연상되었다. 최후의 날, 죽음이 다가오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고,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 그리고 곧 생명이 다할 것을 직감한 인간의 마지막 선택은 사랑하는 연인을 끌어안는 것뿐이리라. 


    사랑을 나누겠다는 말은 그저 허무한 죽음 앞에서 쾌락에 몸을 던지겠다는 쾌락적 허무주의가 아니었다. 무력하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 공포를 받아들이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지축이 흔들리고 땅이 무너지고, 시펄건 용암이 흐르고, 화산재가 검게 하늘을 뒤덮고, 태양빛이 사라지고, 숨이 막히는 뜨거운 열기가 점점 나에게 다가올 때. 그저 손에 닿는 어떤 것이든 끌어안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도 그냥 실컷 섹스나 하다 절정의 순간에 확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을 거라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의 오르가슴이 정신을 혼미하게 할 때 숨통이 끊어져 버리면 오히려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복상사가 쪽팔린 거야 남은 주변인들의 수군거림 때문이지, 어차피 다 죽어버릴 거라면 누구 눈치를 볼게 뭐 있겠어. 


    어젯밤에 하현상이 부르는 검정치마의 <hollywood>를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이 가사에 대학시절과 영화를 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칼이 일렁이며 내게 손짓했어요 겁내지 말라고 어서 뛰어들래요 타버리면 어때요 다 바스러져 없어질 텐데 나 안 돌아가요 여기 남겨두세요

절박한 순간, 서로를 끌어안은 채 5000년간 연인으로 남아있게 된 두 남녀에게 바칠만한 가사인 것 같다. 그들이 빈틈없이 붙어 있음으로 어쩌면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여 '영원'으로 남게 되었겠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저렇게 끌어안고 화석이 된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끼리 도망치다가 포기하고 서로 결합했을 수도 있고, 각자 연인이 있는데 만날 수 없어서 옆집 사람과 끌어안고 있었을 수도 있다. 둘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덧씌운 환상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과는 관계없이 저 모습에서 사랑을 읽어내는 이유는, 허무한 우리의 삶에 빛을 더할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라도. 


    원곡은 검정치마가 부르지만 하현상이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버전을 더 좋아한다. 검정치마의 버전은 좀 더 몽환적이고 할리우드의 석양과 잘 어울리는 붉은빛의 음악이다. 내가 어쿠스틱을 선호하는 것은 그게 좀 더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버전이든 원하는 대로 들어보면서 가사를 음미해보면 좋겠다. 


    가사를 쓴 검정치마의 조휴일 씨는 양귀비 꽃에서 영감을 얻어 쓴 곡이라고 한다. 붉은 머리칼은 붉은 꽃잎이고 잔털 없는 목덜미는 솜털 없는 마약 양귀비의 향을 맡는 것을 묘사했다. 사랑하는 이의 향기는 마약 같다는 뜻이겠지. 사랑에 대한 도취,(어떠한 것에 마음이 쏠려 취하다시피 됨.) 죽음의 공포를 잊게 하는 마약성 진통제 같은 사랑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6cQgRQ7g24&t=139s

https://www.youtube.com/watch?v=bK7hXF3ULfM


<Hollywood> -검정치마

오, 지금 밟고 있는 땅이 꺼질 것만 같아 

내 손을 놓는 순간 녹아 없어질걸요 

넌 영화 속에 살고 그런 너를 지켜보네 

조명을 내려줘요 


잔털 하나 없는 너의 가느다란 목에 숨 쉴 때 

나 몸이 떨려와 그만큼이나 좋아 

하얀 마음 때 묻으면 안 되니까 사랑해줘요 

처음만 있고요 끝은 아득하네요 


baby i just don’t know what to say you were my dream you were my dream 

(자기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넌 내 꿈이었어.)

you were my dream and now it all feels so real you are real.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게 나에게는 현실처럼 느껴져, 넌 지금 내 앞에 있어.)

heavy hugs and light hearted jokes

(깊은 포옹과 가벼운 농담들)

 quit my day job just to stay up all night with you

(너와 온밤을 보내기 위해 내 일을 관뒀어)

 we are going to hollywood and never coming back coming back 

(우리는 할리우드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maybe we’ll turn to gold

(우리는 빛나게 되겠지)


붉은 머리칼이 일렁이며 내게 손짓했어요 

겁내지 말라고 어서 뛰어들래요 

타버리면 어때요 다 바스러져 없어질 텐데 

나 안 돌아가요 여기 남겨두세요 


don’t stop action, friction live in a fiction baby 

hollywood 

don’t stop action, friction live in a fiction baby 

hollywood

(아무것도 하지 마, 이 환상 속에서 살자. 할리우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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