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사람이 싫다
잘못 된 결혼은 지옥이다.
난 착한 사람이 싫다.
나에게 '착하다'라는 말은 다루기 쉽고 만만하다는 뜻이다. 난 별로 착하지 않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내 이익도 많이 생각한다. 신기한 게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더 함부로 대하고, 까다로운 사람의 비위는 맞춰준다. 그래서 난 이것저것 까다롭게 군다.
"이건 내가 불편한데요."
"난 이런 거 재미없어요."
퉁명스럽게 투덜거리면 사람들은 조금 물러난다. 그다음부터는 나에게 아주 공손해진다.
내 주변에 제일 착한 사람은 큰 엄마다. 내 아버지의 형의 아내. 목소리도 작고 상냥하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엔 큰 엄마는 천생 여자였다. 꼼꼼하게 집안일을 하고 그림도 곧잘 그리셨다. 큰 아빠랑은 대학시절 서예부에서 만났다. 우리 엄마가 결혼할 때 커다란 액자에 시를 써서 선물했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큰 아빠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일본과 무역을 하며 제법 돈도 많이 벌고 할머니의 자랑이었다. 그런 큰아빠가 희귀 난치병으로 18년 전쯤 병원에 입원했고 그 후로 10년을 식물인간처럼 누워 지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일찍 남편 여의고 갖은 고생으로 세 남매를 키운 할머니의 하늘 같은 장남이 무너졌으니. 큰엄마는 그 후로 큰아빠를 떠나지 않고 병간호를 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며 부업도 했다.
남편의 병간호
시어머니 모시기
큰며느리 노릇
두 아들을 키우기.
한 사람에게는 너무 가혹한 운명인 것 같다.
큰아빠는 몸이 조금 회복된 후부터는 술을 마셨다. 잘 나가던 자신이 그렇게 몸져누운 게 자존심이 상했겠지. 큰아빠의 몸은 점점 더 나빠졌다.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술상까지 차려야 하는 마음은 어떨까. 나였으면 진즉에 이혼도장을 찍든, 칼부림이 났을 것 같다. 근데 큰엄마는 계속 참고 견뎠다. 근데 그렇게 참으니 큰엄마 몸에 병이 났다. 위암, 그다음은 자궁적출. 암 수술 후 병간호는 큰엄마 친정에서 받았고, 수술 직후에는 우리 엄마가 가서 병간호를 해줬다. 자기 엄마가 누워 있는 수술실에서 두 아들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단다. 그 모습에 기가 차서 우리 엄마가 나무랐다.
"너네는 엄마 아픈데 고생 많았어요... 뭐 이런 말도 못 하니?"
큰 엄마는 그저 배시시 웃었단다. 딸 없는 엄마들은 참 서럽다.
3년 전이었나. 위장, 자궁, 다음은 심장이었다. 큰엄마가 심장수술을 앞두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할머니께 전화를 해서 올해부터 제사는 그만하자고 했다. '그 지긋지긋한 제사. 남의 집안 딸들 손 빌려서 지내는 그 제사. 그만하자. 큰엄마 아픈데 그만 고생시키자. 죽은 사람 기리다 산사람 보내겠다.'
할머니는 뭐라고 했더라? '그래도 제사를 지내야 조상님이 우리 잘 돌봐준다. 잘 되게 해 준다.' 그랬던가? 속으로 또 송곳이 올라온다. '그렇게 조상이 잘 돌봐서 집안이 이 꼴이냐. 그래서 큰엄마가 저리 큰 병에 걸렸냐. 그러면 우리 조상이 잡귀신이랑 다를게 뭐냐.' 송곳 같은 말을 쏘아대는 대신 아무 말 안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는 할머니 전화를 안 받는다. 시댁 사람은 가족이 될 수 없다. 난 그걸 결혼도 하지 않고 깨달았다. 아빠한테 큰엄마께 제사 비용이라도 넉넉하게 챙겨드리라 했더니, 내가 무슨 ATM이냐고 버럭 했다. "아빠의 엄마를 돌보고, 아빠의 형을 돌봐준 사람이다. 제사비용 드리는 걸 넘어서 큰절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시댁 사람들은 가족이 될 수 없다.
그 해 제사가 끝나고 나는 엄마랑 큰엄마를 내보냈다.
"두 분이 어디 놀러 가세요. 어디 도망이라도 가세요."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근데 큰엄마는 그날 외박도 안 하고 돌아왔다. 그냥 운전해서 잠깐 바다를 보고 왔단다. 바다를 보니 너무 좋다고 큰엄마는 소녀처럼 웃었다. 그러고는 심장 수술하러 서울로 혼자 가셨다. 서울에 두 번째 올라갔을 때 큰 아빠가 술을 거하게 드시고 집안에서 난동을 부리다 액자를 깼다. 기가 차서 바라보는 큰 엄마한테 큰아빠는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놓으니 보따리를 내놓으란다. 깨진 액자를 수습하고 큰아빠를 병원에 데리고 간 건 우리 엄마다. 이 집안은 도무지 며느리들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나의 남동생은 술을 마시고 큰아빠가 불쌍하다고, 큰아빠를 이해한다고 운다. 넌 큰아빠가 불쌍하니. 난 큰엄마가 더 불쌍한데. 남자라 남자가 더 잘 이해되니. 난 큰아빠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작년에는 드디어 큰엄마가 집을 나왔다. 큰아빠가 싫어하는 정치인이 당선된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술에 잔뜩 취해서 밤새 욕설을 하니까, 큰엄마가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렇게 화를 내냐'라고 한마디 하신 게 화근이었다. 그 화살이 고스란히 큰엄마에게 가서 '무식한 것, 배우지도 못한 것' 갖은 무시와 욕을 퍼부었단다. 그걸 또 밤새 참다가 아침까지도 계속하니 도저히 못 참아서 짐을 싸서 나왔는데, 웃긴 게 우리 할머니도 따라 나왔다. 며느리 도망갈까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쭐래쭐래 따라 나와서는 우리 엄마를 불렀다. 우리 집에서 내가 차려준 밥상머리에서 할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네가 힘든 거 안다. 애들 결혼할 때까지만 참아라. 그러면 내가 집 한 채 얻어줄게. 내가 자식을 잘 못 키웠다. 그래도 이번 달 제사는 지내야 된다."
가증스러운 노친네.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엔 큰엄마가 더 참으란 소리다. 그래 놓고 큰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나한테 큰엄마 험담을 한다. 예전엔 고분고분했는데 요새 변했다고. 또 속에서 송곳이 올라온다. 그걸 늙은이를 찌르면 내가 죄를 짓는 것 같아 그냥 내가 집을 나와버렸다. 큰엄마한테는 이혼하고 도망가서 큰엄마 행복을 찾으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냥 그대로 친정으로 가세요. 어디 남모르는 곳으로 떠나요.' 그렇지만 큰엄마의 가출은 하루도 못가 종결되었다. 큰엄마는 다시 우리 집안 큰며느리가 되었다. 그때부터는 나도 큰엄마가 괜히 밉다. 왜 도망도 못 가고, 싸우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근데 착해 빠져서 날 이렇게 속상하게 하나. 제사도 안 가기로 했다. 여전히 남자들은 술 마시고 여자들만 일하는 집안 꼬락서니도 마음에 안 들고, 술 가져오라고 으름장 놓는 큰아빠나 그걸 또 조용히 가져다주는 큰엄마나 다 꼴 보기 싫다. 우리 부모님도 내 성격을 아니까 제사 안 간다고 해도 그냥 내버려 둔다.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 만약에 누구라도 내 엄마에게 저렇게 대한다면, 내 엄마에게 저 짐을 떠넘긴다면 난 거기가 제사상 위라도 칼춤을 추겠다고. 길거리든 어디든. 내 엄마는 내가 지킬 거라고 이를 아득바득 간다. 근데 큰엄마를 위해 내가 싸울 수는 없다. 사실 엄마든 큰엄마든 그들의 인생에서 나는 제3의 존재일 뿐이다. 직접 부당하다고 말하고 그만두어야 할 사람이 입을 다물고 그만두지 못한다. 그래서 더 속상하다. 이래서 착한 사람이 싫다. 착한 사람들은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을 너무 괴롭게 한다. 참지 말지, 하기 싫다고 말하라고, 자기를 위해서 좀 싸우라고 말해도 그러지 못한다. 내가 화를 내면 되려 나를 말린다. 괜찮다고 그러는데 뭐가 괜찮아. 괜찮아서 그렇게 몸이 아픈 거냐고. 근데 그런 모진 말도 못 하는 게 착한 사람에게 상처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난 눈도 감고, 입도 다물어 버린다. 그러면 이제 아무것도 안 하는 날 탓하게 된다. 여기까지 감정이 올라오니 울컥 토악질이 나온다. 내 장기는 너무 예민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감정적이게 되면 음식을 받아주질 않는다.
이래서 난 착한 사람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