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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Aug 23. 2021

나의 글 어머니, 박완서

몸의 어머니는 있지만 정신의 어머니도 따로 있지.

    박완서 작가의 글을 사랑한다. 처음 그녀의 작품을 읽은 것은 초등학생일 무렵이었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소설이었다. 한국전쟁 중에 사람들이 피난을 가고 텅 빈 서울을 묘사한 장면이 압권이었다. 북적이던 대도시가 숨죽인 그 풍경을 몇 개의 문장으로 표현하다니. 읽은 지 오래되어 그때의 기억이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그 순간 내가 느낀 압도감은 생생하다. 


    소설도 좋지만 더 좋아하는 것은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이다. 수필, 영어로는 에세이(essey). 그녀의 수필은 인간을 애틋하게 애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도 날카롭게 위선을 가려내는 눈이 매력이다. 어쩌면 작가의 역량이란 글솜씨보다 사람과 세상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진실과 위선을 가려내는 정직함이 쓰는 글에도 고스란히 묻어 나오기 때문에 눈과 손이 작가의 가장 큰 자산이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는 그런 진정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고, 그것은 스스로의 내면을 정직하게 투영해낸 결과일 것이다. 


    요즘 박완서의 산문집 「쑥스러운 고백」을 읽고 있다. 시대가 달라도 인간은 다르지 않아 그녀의 이야기가 십분 공감된다. 그중에 한 구절을 가져와봤다.


사람들은 몇천 년을 두고 늙은이는 젊은이 하는 짓에 '말세로다 말세로다' 한탄을 하는 짓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도 말세는 안 왔고 젊은이들에 의해 역사는 발전해왔지 않은가.
-「머리털 좀 길어봤자」中-


    어디 고대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표현이 나온다던데.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몇천 년을 이어져 현대에도 여전히 반복된다는 것을 보면 유쾌한 동시에 섬뜩하기도 하다. 이렇게 빠르게 기술이 진보되는 와중에도 인간의 정신은 전혀 진보하지 않았다는 의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레바퀴가 발명되어 말과 소로 짐을 옮기는 수메르 청년들을 보면서 늙은이들이 "나 때는 다 손으로 했던 일을 요즘애들은 나약해서 수레바퀴에 의지하더라. 근성도 없이 일이란 걸 배우겠어? 수레바퀴 없으면 농사는 어떻게 지으려고 하는지... 쯧쯧"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요즘도 똑같은 것이다.


스마트폰이 발명되어 모든 정보와 즐거움을 스마트폰으로 찾아내는 청년들을 보면서 늙은이들이 "나 때는 종이 책과 신문을 읽으면서 깊이 있는 지식을 배웠는데 요즘애들은 회사에서 메모도 스마트폰으로 하더라. 그렇게 기계에 의지해서 뭘 배우겠어? 스마트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쯧쯧" 혀를 찬다.


덧붙여 메타버스니 비트코인이니 하는 신기술에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애들은 정이 없고,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성실하게 현실적으로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쯧쯧"이라고 하는 어른들이 있다. 정작 젊은 이들은 가상 세계에서 부캐도 만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잘만 먹고살던데 말이다. 기술이 인간의 의식보다 빠르게 발전한다는 게 늘 이런 세대차이를 만든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하고 잘 못된 지식이라 폄하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그러니 세상이 빨리 발전할수록 젊은이들에게 혀를 차는 늜은이들이 많아지고, 소위 말하는 꼰대의 수가 늘어가는 거겠지. 그런 꼰대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도처에 존재한다. 이쯤 되면 육체의 나이가 아니라 정신의 나이로 주민등록증을 새로 파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이루는 근본은 물리적 힘이듯이 인간을 이루는 근본은 영혼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오기도 그녀에게 간파당한 듯 산문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기란 억눌리고 약한 자가 스스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권세도 없고, 돈도 없고, 따라서 늘 푸대접만 받게 마련인 약한 자가 자기도 엄연히 살아 있는, 깨어 있는 인간임을 확인하고 타인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오기는 있는 것일 게다.
-「오기로 산다」中- 

    뜨끔. 내가 이렇게 고고한 척하는 것도 돈도 지위도 뭣도 없는 아무개라서 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사람도 알량한 권력과 돈 몇 푼 쥐고 나면 고깝게 보던 그들과 똑같아질 수도 있겠지. 그렇게 허둥지둥 내 속을 뒤져서 어디 숨겨 놓은 위선이 없는지 뒤져본다. 가 세상을 보고 배운 바, 사람의 위선이란 언젠가는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것에는 영리한 머리와 욕망이 가장 중요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이 나를 찾는다. 비록 그것이 내 삶의 시간과 조금 다를지언정, 시간이 가치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유행에 휩쓸리고 남 말에 쉽게 속지만 오직 시간만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것들은 자연스레 없어지고 의미 있는 것들만 남긴다.


시간이 증명하는 작품이 명작(名作)이고

시간이 증명하는 음악이 명곡(名曲)이고

시간이 증명하는 물건이 명품(名品)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내놓고 싶다.

사람이 아니라 시간에게 평가받는 가치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의 정신적 딸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으니, 박완서 작가의 글은 시간이 증명하는 명작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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