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살았던 WG(Wohngemeinschaft; 주거공동체)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5명이 모여 살았다. 그중에 항상 잘 웃고 유쾌한 토고 출신 조이스(joice)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친구는 항상 형제자매들과 통화 중이었다. 토고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조이스가 통화하는 목소리는 나에게 독특한 노래처럼 들렸다.
하루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조이스에게 대체 형제가 몇 명이냐고 물어봤는데, 다 합쳐서 자그마치 17명이라는 것이다! 너의 아버지께서 애들 이름은 다 기억하시냐고 물으니 당연하다고 대답했지만, 애들 생일도 기억하시냐는 질문엔 그냥 웃기만 했다.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내 표정이 아주 웃겼는지 조이스가 특유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설명해줬다.
토고에서 아버지가 4명의 부인을 들였고 조이스의 어머니는 3번째 부인이다. 조이스의 아버지는 지참금을 내고 4명의 부인을 데려올 수는 있었지만, 그에 딸린 자식들은 다 건사하기 힘들어서 조이스의 형제들은 일치감치 자립해야 했다. 조이스는 독일에 홀로 건너와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고 조이스의 약혼자는 토고에서 돈을 모으고 있다. 후에 약혼자가 독일에 오면 독일에서 정착하기로 약속했다. 조이스의 약혼자는 교회에서 만났는데, 교회에서는 일부일처제를 교리로 가르치기 때문에 일부다처를 싫어하는 젊은이들은 교회에 와서 짝을 찾는다고 한다. 일부다처를 하면 결혼하려는 남자들은 많고 젊은 여자들 수는 제한되어 있으니 지참금이 점점 높아진다. 결국 돈이 많은 사람들이 여러 번 결혼하고 지참금을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간 일부일처가 유일한 규칙인 세상에서 살았는데, 일부다처와 일부일처가 공존하는 나라의 이야기를 들으니 굉장히 놀라웠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일부일처는 수요-공급을 맞추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자들이 결혼하려는 욕구는 넘치는 수요에 해당하고, 가임기 여성의 수는 제한된 공급에 해당하여, 수요가 월등히 높으면 공급재의 시장가치가 높아진다는 기본적인 경제상식 말이다.
◆사랑이 아닌 결혼이란 제도
사랑으로 만난 두 남녀의 결합으로서의 결혼이란 개념이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람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하는데 비해, 제도는 천천히 변하기 때문에 일상적 곳곳에서 사고방식이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당장에 고부갈등만 하더라도, '난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한 건데 왜 며느리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또 출산이나 자녀에 대해서도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 부부의 선택으로 변했다.
농경사회에서 남성의 노동력과 여성의 생식력을 교환하는 형태로서의 결혼은 자녀 출산과 노동이 당연한 의무였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으면 여자가 소박맞기도 일쑤였고, 마땅히 남성은 노동력으로 일가족을 먹여 살리고 여성은 가정에서 아이를 기르고 집안일을 해내야 했다. 그런 형태의 가족은 낭만적인 사랑이라기 보단,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노동계약에 가까웠다. 그런 시대에서 사랑이란 그렇게 살붙이고 산전수전을 겪고 나면 은근슬쩍 정이 든다는 의미 정도였겠지.
◆쉽게 변하는 사랑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은 필연적으로 이혼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감정 자체가 쉽게 변하는 것이고 인간이란 동물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일부일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의 한 반려자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요즘 일부일처라는 단어는 평생에 한명이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을 사랑하는 모노 아모리(monoamory;독점적 사랑)에 가깝다.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노동인구를 재생산하고 양육하는 최소 단위를 가정이라고 부른다면 사랑 없이 서로의 필요에 의한 결혼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아이를 낳고. 그런 거래에서 남자는 경제력이나 권력을 내세우고 여성은 젊음(여성의 가임기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이나 아름다움을 서로 교환하려 할 것이다.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반대로 사랑은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를 만들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를 만든다. 결혼의 조건을 초월해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만든다. 그래서 사랑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경제적이지 못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게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사랑의 등장
요즘에는 그런 사랑의 의미조차 변해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바람으로 치부되었던 관계가 다자 연애나 폴리아모리, 오픈 릴레이션쉽이란 단어로 불린다. 단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의미이다. 한 사람과의 독점적인 관계가 아닌, 다른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관계.
한때는 일부다처가 기준이었고, 지금은 일부일처가 기준일 뿐이다. 인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회를 지탱할 결혼 제도를 선택해 왔다. 일처다부나 민며느리제나 데릴사위 같은 것들로 소소한 변주를 주면서. 지금의 물결은 일부일처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다음 세상을 지탱할 사회의 질서는 무엇일까?
◆일부일처의 변명
그럼에도 일부일처가 주는 특유의 매력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는 짜릿함. 익숙한 관계에서 오는 특별한 감정. 두 사람이 강한 친밀감으로 구속되는 건, 한 번에 한 명에게 나의 온 마음과 시간을 투자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과 같은 도박처럼. 한 명에게 올인(All-in)해서 잘하면 잭팟이 터져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허락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덧붙여 지금의 일부일처가 아무리 한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켜온 질서임은 틀림없다. 가정을 지키는 아버지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 남성들이 있었고,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을 헌신적으로 해낸 여성들이 있었기에 인류가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으니.
힘을 잃어가는 일부일처제에게 애도를 표하며 존경의 마음으로 장례를 치러줘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