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거제도 여행기
거제도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메뉴가 멸치 쌈밥이었다. 기장에 가족 여행을 갔을 때도 한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자작한 멸치조림과 멸치 초무침을 신선한 채소에 싸 먹는 음식이다. 늘 마른 멸치만 먹다가 통통하고 신선한 멸치를 통째 먹는 것도 별미였다. 늦은 아침 숙소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커피를 한잔 마시며 멸치 쌈밥을 먹으러 갔다. 어제 굴구이는 완벽했는데 과연 멸치 쌈밥은 어떨까?
노란 간판이 있는 거제 멸치 쌈밥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진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음... 냄새부터 합격인데? 멸치찌개와 멸치 초무침, 다시마와 찐 양배추, 깻잎, 상추와 각종 밑반찬으로 상이 차려졌다. 톳 무침이 고소하고 간이 적절해서 엄마와 함께 어떤 재료를 썼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때부터 종종 이렇게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맞추는 놀이를 하곤 했는데, 이런 시간이 나의 미각을 발달시켜준 것 같다.
멸치 초무침은 새콤하여 다시마에 감싸 먹는 것도, 향긋한 깻잎에 싸 먹는 것도 좋다. 자글자글 끓여 먹는 멸치 찌개는 국물 맛이 일품이다. 멸치 맛이 고소하면서 비린내는 없고 국물에서 깊은 맛이 느껴졌다. 엄마랑 국물만 연거푸 10 숟갈쯤 떠먹었을 것이다. 옆 테이블의 주문을 듣고 웃음이 터졌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
낮 12시부터 소주를 부르는 국물 맛이긴 해.
두 공기는 먹겠다며 호기롭게 달려들었지만 한 공기로도 배가 불러 숟가락을 내려놓게 된다. 평소에는 늘 반공기만 먹으며 다이어트를 하는 엄마도 한 공기를 거의 비운 걸 보니 이 집 손맛을 인정하게 된다. 바로 옆에 가게에서 파는 멸치 간장이 보여 한 병 구매하게 되었다. 친절한 사장님은 멸치 간장으로 미역국 끓이는 법이나 톳 무침 만드는 법도 알려 주셨다. 잘 먹었다며 연거푸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기서 키우는 고양이예요?"
"아니 안 키우는데 밥 먹을 때라고 저렇게 앉아 있어요."
"근데 쟤는 애꾸눈이네요?"
"처음 봤을 때 눈을 다쳐서 수술시켰어요."
키우는 고양이는 아니지만 밥도 주고 수술도 시켜주신 모양이다. '츤데레 사장님이시네요.' 한가로이 고양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음식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정 많은 사장님의 맛있는 한 끼 식사였다.
엄마의 증언으로는 내가 5살 때부터 커피를 좋아했다고 한다. 프림과 설탕을 탄 달콤한 커피 맛을 좋아해서 엄마가 몰래 먹으려고 찬장에 커피를 숨겨놓기라도 하면 의자를 밟고서라도 찾아냈다고 한다. 조금 머리가 자란 후에 '커피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는 마시지 않게 되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선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
기억하기로는 2012년쯤 엄마가 작은 카페를 여신적이 있다. 아메리카노도 생소하던 시절에 이탈리아의 고급 원두를 들여와 카페를 차렸지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 후 엄마가 카페를 정리하고 몇 년 뒤에 한국에도 아메리카노와 라떼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기가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며 안타까운 일이라 지금도 종종 다시 카페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카페에 메여 있기 싫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대신 내가 카페를 연다면 노하우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뒤로 종종 엄마와 카페 투어를 다니곤 하는데 인테리어나 카페의 메뉴, 위치 등을 보면서 이후에 어떤 카페를 할지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취향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엄마는 세련되고 모던한 인테리어 취향이고 나는 따뜻하고 편안한 인테리어 취향이다.
외도 널서리는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카페인데 나무 소재로 만들어진 온실에 초록 식물이 가득한 인테리어가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이다. 삼각형으로 높은 천장에는 하얀 광목천이 햇빛을 가려주고 있고 곳곳에 행잉 플랜트나 화분들이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 준다. 작은 인테리어 소품들이 아기자기하고 채광이 좋으니 어디서 찍어도 사진이 예쁘게 잘 나온다.
이곳의 시그니처 커피는 연유와 생크림을 올리고 거제산 제피를 올린 아이스커피인데 연유 맛이 느껴지는 아인슈페너라고 설명하면 되겠다. 제피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디저트로는 몽돌을 형상화한 초콜릿 케이크가 있다. 바삭한 쿠키 위에 초콜릿 케이크 시트, 부드러운 가나슈 크림을 화이트 초콜릿 틀 안에 채워 몽돌 색의 마블링을 뿌렸다. 동글동글한 조약돌 모양이 귀엽기도 하지만 과하게 달지 않은 초콜릿의 맛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흙처럼 뿌려진 쿠키 크럼블은 카카오 파우더의 맛과 진한 버터향이 강한 편.
창가에 앉아 바닷물결에 부서지는 햇빛을 감상하고 카페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나중에 카페를 열면 어떻게 꾸밀지 상상해봤다. 식물을 잔뜩 가져다 놓고 싶다는 말에 엄마는 관리가 힘들 거라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신다. 내 환상을 산산이 깨지게 만드는 게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다시 카페 내부를 보니 과연 시들시들한 화분이 몇몇 보인다. 이 모든 식물을 건강하게 보살피려면 많은 노력과 애정이 필요할 테지. 카페 공간을 지키고 꾸민다는 것에는 주인장의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고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런 세심함에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오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면 내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되겠지?
제법 바닷바람이 차가웠지만 오래간만에 탁 트인 바다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좋은 여행이었다고 행복해하며 돌아온 집에는 고양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에서 아버지께 우리끼리만 가서 미안했다고 하니, 되려 고맙다고 하신다. "엄마 생일 챙겨줘서 고맙다." 아무래도 우리 아빠가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 '엄마라는 존재'는 늘 우리 가족을 지탱해 준다. 내년에도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