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가 날 사랑하는지는,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아버지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는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신다. 아버지에게서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무심한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최대한의 감정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 상대를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헌신하고도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감정이 드는 사랑의 형태다.
반면에 어머니의 사랑은 오감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서, 나를 쓰다듬는 손의 온기에서, 나를 위해 차려준 밥상에서, 어머니의 품에서 나는 '엄마 냄새'에서 사랑이 느껴진다. 나이가 32살이 되고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뽑으라면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밖에서는 성숙한 척하는 30대의 여자도 엄마 앞에서는 갓 태어난 짐승 새끼가 젖을 찾듯 품을 파고든다.
가끔 거울을 보고 화장을 하면 엄마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볼 때가 있다. "어디 가는데 그렇게 예쁘게 하고 가?"라고 묻는 엄마의 음성이 다정하다. 그 눈빛은 예쁜 것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다. 작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들, 가령 뽀송뽀송한 병아리나 소담스럽게 핀 꽃송이를 볼 때처럼 엄마는 나를 바라본다. 그럼 나는 집중해서 마스카라를 바르다가도 괜히 쑥스러워진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이렇게 사람의 볼을 붉히고 어쩔 줄을 모르게 만든다.
어느 날은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프로그램을 보다가 엄마의 회개 시간이 있었다. "저런 프로그램을 보면 너나 네 동생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해줬어야 했는데 그때는 몰랐어." 괜스레 나를 품에 안고 "우리 딸 사랑해."라고 말한다. 왠지 모르게 눈물을 슬쩍 오르는 기분이라 황급히 크게 웃어버린다. 우리 딸이라고 부르는 그 음성이 못 견디게 좋다고 말하기에는 미숙함을 인정하는 것 같다.
5살 즈음 밤새 열병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날 새벽에 엄마는 밤새 차가운 물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 주었다. 나는 누워 있었고 힘겹게 뜬 시야에는 엄마의 실루엣이 보였다.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가 나를 지켜준다고 느꼈다. 엄마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내가 열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렸던 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엄마 고마워."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괜히 퉁명스럽게 "빨리 낫기나 해."라고 대꾸했다고 했다. 내가 감동을 받으면 괜히 툴툴대는 버릇은 엄마에게서 온 것 같다.
그 무렵 살았던 주공 아파트는 복도식 아파트라 한 층에 사는 이웃들이 친하게 지냈다. 엄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모여 퀼트나 뜨개질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엄마를 찾으러 옆집, 윗집, 아랫집을 돌아다녔다. 그 중에 한집에서 엄마는 아주머니들과 모여 바느질이나 레이스를 뜨고 있었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아서 하얀 레이스를 떠서 장식을 하거나, 자투리 천으로 귀여운 호박 인형을 만들어 주곤 했다. 엄마는 손으로 만들어 내는 건 뭐든지 잘했던 것 같다. 저녁 시간이 되면 엄마는 나에게 두툼한 요리책을 주면서 먹고 싶은 것을 골라보라고 했다. 음식 사진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짚으면 간단한 불고기나 된장찌개부터 탕수육까지 척척 만들어 주셨다. 엄마와 함께 도넛을 만들었던 날은 반죽에 동그랗게 찍는 틀 대신 동생의 분유통 뚜껑으로 찍어 냈다. 조심스럽게 몰랑한 밀가루 반죽을 건네주면 엄마가 뜨거운 기름에 튀겨 설탕을 솔솔 뿌려주었다. 그렇게 만든 도넛을 바구니에 담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것까지가 나의 일이었다. 달콤한 도넛을 들고 이웃집에 들르면 다들 반갑게 맞아주고 사과나 귤 같은 것들을 한 봉지씩 들려주곤 했다. 엄마는 그런 식으로 딸에게 나누는 즐거움을 가르쳐 주었다.
손맛도 유전이라 제법 요리를 즐기게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의 밥이 나를 살리는 것 같다. 매년 봄이면 엄마는 직접 따온 쑥이나 두릅 같은 것으로 반찬을 만들어 준다. 나와 동생이 편식 없이 씁쓸한 봄나물도 잘 먹게 된 것은 엄마 덕분이다. 재작년에는 엄마와 함께 선산에 두릅을 따러 갔다. 두릅나무에 돋아난 새순에는 연하지만 가시가 있고 옷에 진액이 묻으면 없어지지 않아서 버려도 되는 낡은 옷을 입고 갔다. 봄볕에 새색시 얼굴이 새까맣게 탄다는 말처럼 몇 시간이고 두릅을 따고 있으니 제법 땀이 많이 났다. 나무 가지를 길게 늘어뜨려 여린 두릅을 하나하나 따다 보면 시간이 가는 것도 잊게 되었다. 고행을 하는 승려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바구니를 채워 갔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가득 찬 두릅 바구니를 가지고 집에 와서 엄마는 쉬지도 않고 두릅을 다듬고 있었다. 날카로운 가시를 도려내고 먹기 좋게 다듬는데 한두 시간을 보내더니 소고기와 두릅을 산적 꼬치에 꿰어 두릅전을 만들었다. 보드라운 두릅과 육즙이 가득한 소고기를 한입에 베어 먹는 소고기 두릅 산적은 순전히 엄마의 노고로 만들어진 별미였다. 그렇게 엄마는 늘 가족을 먹이는 것이 가장 일 순위인 사람이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여서 늘 나와 동생은 풍족하게 먹고 자랐다.
부모는 노동으로 자식의 배를 채우고, 사랑으로 자식의 가슴을 채우고, 가르침으로 자식의 머리를 채운다. 사랑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이라는 것을 엄마가 가르쳐 주었다. 서른이 넘어서도 가끔 엄마의 품을 파고드는 딸을 한번 밀쳐내지도 않고 새끼처럼 품어주는 엄마를 사랑한다. 문득 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애도 나를 이만큼 사랑할까 궁금해졌다. 그 아이도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줄까. 그 애와 나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엄마와 나는 서로에게 부모와 자식인 동시에, 베스트 프렌드였다. 서로 옷을 빌려 입고 새로 산 화장품을 함께 쓰면서 투닥거리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을 공유한다. 하루는 엄마의 친구가 다쳐서 함께 응급실에 갔더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응급실에는 심정지 환자가 있었고 의사가 환자의 배 위에 올라타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의사가 땀에 흠뻑 젖어 심폐 소생술을 하는 동안 침대 주변에 가족들이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서 20분이 넘어갔지만, 의사도 가족들도 그 누구도 '그만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쯤되면 이미 심장이 다시 뛰지 않을 것이며, 너무 오래 심장을 압박해서 갈비뼈도 다 부러졌을 거라고 했다. 그 중에 한명은 상황을 인정하고 멈췄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치만 엄마, 만약에 엄마가 그 침대에 누워 있었다면 나는 엄마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거야."
그 말을 듣자 엄마의 눈물이 터졌다. 나도 함께 울었다. 내 심장이 멈춰서 그 침대에 누워 있었어도 엄마는 나를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 해도 된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 의사도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해서 20분이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심폐소생술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 엄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엄마에게도 엄마와 아빠가 있다. 그리고 두 분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엄마는 살뜰히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보살피고, 그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본다. 엄마가 외할머니를 돌보듯 내가 엄마를 돌봐야 할 때가 온다. 그리고 차마 '그만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없는 날도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