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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l 18. 2022

그들이 보는 내 몸

몸뚱이에 관한 이야기(1)

"잘 먹어서 예쁘다."

    출생 당시 3.6kg. 난 산부인과에서 제일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신생아였다. 타고난 먹성이 좋아 이유식도 건너뛰고 바로 어른들과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고 했다. 어렸을 때는 잘 먹는 것만으로도 '예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늘 통통한 체격이었고 또래보다 한 뼘은 더 큰 아이였다. 


    12살, 조금 때 이른 2차 성징이 찾아오고 난 후, 위로 자라던 것이 멈추고 옆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젖가슴이 커지고 엉덩이가 커지는 만큼 허벅지나 허리의 군살이 생겼다. 가족과 친척들은 종종, 아니 자주, 살을 빼라는 이야기를 했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복싱을 한 달, 수영을 세 달, 요가를 세 달 정도 배웠다. 사람을 때리는 것이 영 거북하여 복싱에 흥미를 잃었다. 수영은 물 공포증을 끝내 이기지 못해 물에 뜨질 못했다. 머리가 물속에 들어갈 때마다 뒷목이 뻣뻣하게 긴장했다. 요가는 그럭저럭 즐거웠지만 이상하게 끝나고 나면 심한 두통을 느꼈다. 두통을 가라앉히려면 요가 수업이 끝나고도 두어 시간 누워있어야만 했다. 꼭 맞는 운동을 찾지 못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살이 더 많이 찌기 시작했다. 삶의 낙이 없던 친구들은 먹을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담을 넘어 학교 앞 떡볶이를 사 먹기도 했고, 한 친구는 집에서 삼겹살과 불판을 가져와 벚꽃 나무 아래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다들 먹을 것에 미쳐 있던 때였다. 매운 떡볶이와 달콤한 간식 같은 것이 입시 스트레스를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들 금세 살이 찌고 교복이 꽉 끼기 시작했다. 고3이 되자 몸무게가 72kg이 되었다. 다들 푸둥푸둥하게 살이 쪘지만 대학입시가 더 급할 때였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나를 꾸미는 자유를 얻었다.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하고 불편한 하이힐을 신고 뒤뚱 거리면서 돌아다니던 때. 살을 빼서 예쁜 옷을 입겠다는 생각에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뒤캉 다이어트'니, '황제 다이어트' 같은 게 유행했었다. 삼시세끼 닭가슴살만 먹고 62kg까지 뺐다. 친구들은 다들 학생 식당에서 차갑게 식은 닭가슴살을 물어뜯는 나를 독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휴학을 하고 살이 더 빠져서 52kg이 되었다. 성인이 된 후 내 인생에서 가장 최저 몸무게일 것이다. 주변에서도 다들 예뻐졌다고 옷태가 다르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그 칭찬들이 기묘한 만족감과 불쾌함을 동시에 주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인데 살이 빠질수록, 겉모습이 예뻐질수록 사람들이 나를 반겨준다. 껍데기와 내면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외모에 집착하게 되었다. 아무도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았다. 외모든 학벌이든 능력이든 정해진 타인의 기준을 맞춰야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예쁘다'는 칭찬이 천천히 내 목에 올가미를 메어놓는 것 같았다.  


    52kg에서 요요를 겪고 65kg가 되었다. 헐렁한 옷을 입게 되면서 '살을 빼라'는 말을 지겹게 들었다. 내가 날씬하고 예뻤을 때 사람들은 다정하고 호의적이었다. 살이 찌고 못 생겨지면 '자기 관리도 하지 않는 여자'라고 비난받기 일쑤였다. '예쁘지 않으면, 날씬하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살이 더 쪘다. 다시 72kg가 되었을 때 헬스장에 등록해서 운동을 시작했다. 나에게 72kg이란 숫자는 '더 이상 찌면 안 되는 최후 방어선'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운동을 해도 식사시간이 매일 다르고 음식관리를 하지 않으니 살은 많이 빠지지 않았다. 6개월 후에도 68kg 정도였다. 그 후로는 채식 식단을 하면서 살을 뺐다. 현미밥과 채소만 먹으니 금방 살이 빠졌지만 탈모가 생겨서 3개월쯤 지나 채식을 포기했다. 그 후로 몸무게는 거의 62kg에서 65kg 사이에서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살 조금만 빼면 예쁠 것 같아."

    여자의 인생은 다이어트의 역사와 같다고 했던가. 나의 삶에서도 살과의 전쟁은 떼놓을 수 없는 문제다. 단순히 체중과 미용의 문제뿐만 아니라 나의 자존감과 건강을 위해 투쟁사와 같다. 몸무게는 딱 자존감과 반비례하여 몸무게가 오를수록 자존감이 떨어지곤 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실제로도 한국사회는 '살찐 사람'에게 매우 무례하고 냉정한 태도로 대한다.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차갑고 아픈 '경멸'이었다. 그나마 가까운 사람들은 그 경멸을 다정한 조언으로 위장해서 던져 놓곤 한다.

<잠자는 욕객>-르누아르

    72kg이었을 때 엄마의 친구는 나에게 "살 조금만 빼면 예쁘겠다"라고 말했다. 평생 들어온 말이라고 웃으며 받아쳤지만 어쩐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색한 내 표정을 읽지 못했는지 잡곡밥을 먹으라는 둥, 운동을 시작하라는 둥. 원하지 않는 충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명절이면 친척들에게 지겹도록 듣는 말이었다. 심지어 할머니는 내가 동생이 먹을 것을 뺏어 먹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하셨다. 그런 말들 속에서 살찐 몸에 대한 명백한 경멸을 느낀다. 살찐 사람은 탐욕스럽게 다른 사람의 몫을 뺏어 먹고, 게으르게 덜 움직일 것이고, 자기 관리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이었다. 


    같은 시기에 목욕탕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벗은 내 몸이 풍만해서 아름답다고 했다. 마치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자처럼 육감적이라고 했다. 목욕탕의 뜨거운 물속에서 낯선 사람의 칭찬을 듣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아름답다는 말에 감사해야 할지, 관찰되었다는 것에 불쾌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색하게 웃어주곤 슬그머니 탕에서 나와 자리를 옮겼다. 그날 거울 속에 비친 벗은 내 몸과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성을 비교해 보면서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나른하게 누워 있는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과 부드러운 피부는 아름다워 보였지만 내가 사는 사회에서 '아름답다'의 속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팔은 더 가늘어야 했고 배와 허벅지는 더 날씬해야 했다. 더군다나 남자의 시선으로 본 젊은 여자의 육체는 관능적이었다. 그림 속 여자는 철저히 객체로서 관찰되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 일뿐이다. 목욕 후에 나른하게 누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훔쳐보는 남성의 관음적인 시선. 내 몸이 풍만해서 아름답다고 말한 아주머니는 자신의 빈약한 가슴에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나에게 투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지고 싶던 것을 가진 사람을 선망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타인은 끊임없이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고 어떨 때는 달콤한 칭찬을, 어떨 때는 아픈 비난을 던져 놓곤 한다. 그리고 나는 단 것만 삼키고 쓴 것은 뱉어낼 능력이 없었다. 사람들이 던진 말들은 머릿속에서 고여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때에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어느 날은 '통통해서 예쁘다'는 말이 튀어나왔고, 어느 날은 '살쪄서 보기 싫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내 자존감은 폭풍이 치는 바다처럼 요동쳤다. 늘 타인의 평가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릴 뿐이었다. "예쁘다"는 말이 "못 생겼다"는 말만큼 괴롭게 느껴졌다.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말랑하게 무너지는 내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약해진 마음으로 또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노력하게 되는 게 싫었다. 달콤한 말이든 아픈 말이든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는 나 자신이 싫었다. 자기혐오와 자기 존중의 굴레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마침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살을 빼거나 화장을 하거나 옷을 사는 모든 행위를 중단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작은 방으로 숨어들었다. 그때 내 나이는 29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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