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혁오 밴드
은남 씨는 세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은남 씨의 동생은 젊어서 죽었고 언니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은남 씨는 마흔 살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님과 살았다. 어느 날 은남 씨는 몸이 너무 피곤하다고 느꼈다. 병원에서는 급성 간염이라고 했다. 약을 먹고 금세 나을 줄로만 알았지만 한 달 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팔순이 넘은 은남 씨의 어머니는 자신의 간이라도 떼어 주고 싶다 했지만, 더는 손쓸 새도 없이 은남 씨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 은남 씨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이었다. 늘 건강하고 긍정적이었던 은남 씨는 남은 이들이 준비할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가버렸다.
오랜만에 엄마와 단 둘이 브런치를 먹는 중에 엄마는 나에게 '은남 씨를 기억하냐?'라고 물었다. 어린 시절에 한 동네에서 살았고 은남 씨는 엄마와 친하게 지냈던 동생 친구의 엄마와 친한 직장동료라고 했다. 오며 가며 마주친 적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이름과 얼굴이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고 엄마는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 아는 사람의 입을 통해 은남 씨의 소식을 알았다고 했다.
"어렸을 때 은남 씨 엄마가 언니랑 자기를 차별해서 키웠다더라."
엄마는 은남 씨의 여러 말들 중에서 유독 차별받았다는 말이 기억난다고 했다. 엄마와 친하게 지내던 아주머니와 은남 씨 세명은 자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의미 없고 유쾌한 많은 말들 속에서 '언니를 더 사랑했던 엄마'를 이야기하는 은남 씨의 얼굴은 퍽 시무룩한 어린아이 같았던 모양이다. 엄마의 사랑이 고파서 나이가 들고도 떠나지 못했는지 은남 씨는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없었다. 늙은 부모님과 언니가 죽고 나면 은남 씨를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던 은남 씨는 늙은 어미가 자신의 간이라도 떼가라고 울부짖은 소리를 들었을까? 평생 사랑받지 못했다고 슬픔을 품고 살았던 은남 씨가 그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제일 안타까웠다. 아니, 더 안타까운 이는 자식을 둘이나 먼저 보낸 은남 씨의 어머니일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는 길에 엄마는 내 손을 잡으면서 웃었다. "그래도 엄마는 딸이 있어서 다행이야." 입은 웃고 있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을 보니 엄마는 마음속으로 나와의 이별을 상상하는 중인 것 같았다. 나의 의무는 엄마보다 오래 살아남아 엄마를 기억해주고 그리워해 주는 것일 테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는 것이다. 사무치는 외로움 끝에는 쉽게 잊히는 덧없는 죽음뿐이다. 부모를 사랑한 만큼의 슬픔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식들의 책임이자 은혜 갚음일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는 내가 울어줄 테지만, 나의 장례식장에는 누가 울어줄까. 외롭게 살다가 혼자 죽어버리게 될까 덜컥 두려울 때면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서 아기라도 낳아야 할 것 같다. 그러다가도 나의 이기심 때문에 태어날 아이가 가여워서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내고 만다.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이 녹록지 않은 세상에 어린 영혼 하나를 초대하고 싶지는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_zHyDbOU1yA
차라리 내 장례식장에는 이 노래를 틀어주면 좋겠다. 억지로 쥐어 짜내는 곡소리가 없어도 적막하지 않도록,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게 좋을 것 같다. 혁오 밴드의 Paul은 왠지 떠난 이를 추모하는 곡 같다. 그것도 군대에서 제대로 갖춘 제복을 입고 브라스 밴드가 연주해주는 장송곡을 생각나게 한다. 잘 살아낸 것만으로도 너의 승리(your victory)라는 위안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등 떠밀려 저물고 마는 삶을 산다. 손금에 그어진 운명처럼 삶과 죽음이라는 명확한 한계 속에서 찰나와 같은 삶을 살다 허무하게 떠나는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개개인의 삶은 시대정신에 지배되고 세계의 운명을 따르게 된다. 이 순간 병원 침대에서 조용히 숨이 멎을 1인과 전쟁터에 숨겨놓은 지뢰를 밟은 1인과 높은 빌딩에서 발끝을 디디고 뛰어내릴 결심을 하는 1인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그들과 같은 땅에 살고 있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도 기억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완전히 잊히고 말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다. 헛되어서 슬프고, 동시에 가벼워서 자유로워진다.
엄마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면서 말했다.
"은남 씨의 이야기를 남겨 놓을까?"
"왜?"
"그냥... 은남 씨를 기억하는 사람이 조금 더 생기면 좋겠어."
"글쎄?"
"엄마, 우리의 삶은 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 같은 드라마가 있는데 이렇게 잊히는 건 너무 아쉽잖아. 그래서 난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기록으로 남겨주고 싶어. 나의 글 쓰는 재주로 그들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남겨주는 거지. 호스피스 병동 같은 곳에 가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거야.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내가 대신 적어주겠다고 하는 거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는 먼 곳을 보았다. 은남 씨의 이야기는 아직 엄마의 마음속에 맺혀있는 듯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2muRGxMESg
Paul - 혁오밴드
예전으로 돌아가
예전에 산다면
우린 우리 마음만 돌보자
새벽을 컵에 담아
날이 차오르면
두 잔을 맞대보자
너와 내가 결국엔 우리가 버려버렸네요
한창 어린 밤 같던 우리 마음도 늙어버렸네요
I hear bugling that boo-woo
It's your victory
I hear bugling that boo-woo
It's your victory
아 잠시 기다렸던 마음은 참 빨라
왜 우린 등 떠밀려 저물까
바싹 마른 추억을 태우는 연기는
왜 이렇게 매울까
우린 손금 속에 살고 있네
난 그게 참 슬퍼
우린 아는 만큼만 했었더라도
충분했겠네요
I hear bugling that boo-woo
It's your victory
I hear bugling that boo-woo
It's your victory Woo-woo
I hear bugling that boo-woo
It's your victory
I hear bugling that boo-woo
It's your vi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