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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Cafe 9 Room

거창하지 않은 홈카페 여정

필터 커피, 프렌치 프레스, 모카포트

by 구름조각

추억의 필터 커피, 필립스 커피메이커

곰곰이 생각해보면 홈카페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부터 커피는 늘 제 삶과 함께 했습니다. 인스턴트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넣어 먹던 것도 홈카페라고 할 수 있다면 제 홈카페 역사는 5세 무렵 시작되었네요. 달달한 설탕 맛이 좋아서 어른들 옆에서 야금야금 커피를 받아먹곤 했어요. 제대로 커피를 만든 것은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제가 마셨던 건 아니고 주말 아침마다 늦잠을 자는 부모님을 위해서 만들었던 커피였죠. 하얀색 드립필터 커피머신에 물을 붓고 종이필터 위에 헤이즐넛 원두 가루를 넣어서 버튼만 누르면 향긋한 커피가 추출되었습니다. 헤이즐넛 향이 더해진 원두커피는 얼마나 향기로운지, 향에 혹해 한 모금 마셔보면 쓰기만 했죠. 그저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아침마다 커피를 내렸던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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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매일 한잔씩 마셨습니다. 바닐라 시럽 2번만 넣은 그란데 사이즈 아이스 라테. 커피 맛을 알았다기 보단 새내기 대학생의 허세에 가까웠죠. 그 무렵 친한 동네 카페 사장님이 직접 로스팅한 드립 커피를 내려주었어요. 커피 맛에 눈을 뜬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케냐, 에티오피아, 브라질... 산지마다 커피 맛이 다르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집에서 커피를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드리퍼, 필터, 캐틀 같은 장비를 구비하는 것도 귀찮았고 괜찮은 원두를 알아볼 안목도 없었으니까요. 집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있었으니 굳이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실만큼 절박하지 않았습니다.


프렌치프레스로 에스프레소를?

독일에서 혼자 1년 동안 살면서 맛있는 커피에 대한 절박함이 생겼습니다. 독일 카페에서 마셨던 커피는 어째 영 입맛에 맞지 않았어요. 지옥에서 악마가 내려준 듯 진하고 뜨겁고 씁쓸한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그런 진한 드립 커피를 찾을 수가 없었죠. 그렇다고 가난한 유학생이 멋들어진 장비를 구비해 놓고 커피를 만들 수는 없었답니다. 고민하다가 구매한 것이 프렌치 프레스와 분쇄된 원두커피였어요. 슈퍼에서 일리 사의 에스프레소용 분쇄 커피를 쉽게 구매할 수 있어서 그라인더를 살 필요가 없었죠. 프렌치 프레스는 뜨거운 물에 커피가루를 넣고 조금 우러나길 기다린 후, 거름망을 천천히 내려 커피 가루를 가라앉혀서 위에 뜬 맑은 커피를 마시는 도구입니다. 단순하고 직관적이면서 종이필터를 계속 구매할 필요도 없었어요. 1년간 프렌치 프레스와 함께 행복한 커피 타임을 가졌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가늘게 분쇄한 에스프레 소용 커피를 스테인리스 거름망에 거르느라 미분이 둥둥 떠다니는 커피를 잘도 마셨네요. 무지함에서 온 낭만이라고 해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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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이 프렌치 프레스를 짐가방에 넣고 가져왔어요. 에어캡으로 둘둘 말고 옷가지 속에 숨겨서 가지고 왔는데도 유리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한동안은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마셨는데 어느 날은 쌓인 종이컵들이 너무 꼴 보기 싫더군요. 매일같이 커피를 사러 나가는 것도 귀찮고, 종이컵을 분리수거하는 것도 귀찮고, 뜨거운 커피 때문에 환경호르몬이라도 우러나면 어쩌나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고민하다 새로운 홈카페 도구를 들이기로 했죠. 간단하게 사용하면서 진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경제적이기까지 한 모카포트를 구매했습니다. 이참에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그라인더도 하나 샀습니다.


가볍고 간단한 모카포트

모카포트는 아래쪽에 물을 붓고 끓이면 뜨거운 물이 원두가루를 통과하면서 커피가 위쪽 주전자에 고입니다. 고온 고압으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와 비슷하지만 좀 더 연한 특성을 가지고 있죠.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제법 아메리카노 같은 맛이 납니다. 알루미늄 모카 모트는 가볍고 저렴한 데다 잘 관리만 하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도 금세 모카포트 사용법을 배워서 각자의 스타일대로 커피를 만들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항상 원두를 꽉 차게 담아서 진하고 쓴 커피를 만들었고 어머니는 늘 커피를 적게 담곤 하셨죠. 부모님은 제가 내린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하셨지만 원래 커피라는 게 남이 내려준 게 제일 맛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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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카포트와 프렌치프레스의 공통적인 단점이 있는데 바로 미분이 생긴다는 겁니다. 커피를 분쇄하면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가루가 생기는데 이 가루가 잘 걸러지지 않으면 커피잔 아래 까만 가루가 남게 됩니다. 늘 한 모금씩은 남겨야 깨끗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어요. 또 그 무렵 알루미늄이 치매를 유발할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죠. 알루미늄 모카포트가 영 찝찝하게 느껴졌어요. 저 같은 덜렁이들은 모카포트를 가스불 위에 올려놓고 깜빡 잊을 때도 많습니다. 모카포트 2개를 홀라당 태워먹고 한 번은 손잡이가 녹아내리기까지 했어요. 모두의 안전을 위해 모카포트와 이별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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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필터 커피, 하리오 V60

돌고 돌아 결국 필터 커피로 돌아왔네요. 입문용 세트로 구매한 하리오 V60은 트라이탄 소재로 만들어 가볍고 깨지지 않습니다. 구릿빛이 멋진 동 드리퍼나 도자기로 만든 드리퍼는 추출 전에 예열을 잘해줘야 하는데 트라이탄은 그 과정을 생략해도 됩니다. 종이필터는 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고 접어서 드리퍼에 넣어준 후 뜨거운 물 한번 부어서 린싱합니다. 린싱(rinsing)은 헹궈준다는 의미인데 종이필터를 드리퍼에 잘 달라붙게 하고 종이 냄새를 없애주는 과정입니다. 드리퍼에 설탕 알갱이 크기로 분쇄한 커피 20g에 뜨거운 물 300ml 정도 부어주면 됩니다. 멋 부리듯 팔꿈치를 휘적이거나 점처럼 물을 한방울씩 떨어뜨려 추출할 필요는 없어요. 분쇄한 원두가루에 뜨거운 물을 조금부터 원두를 불려준 후에 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물을 부어 주세요. 적당히 내려지면 맛을 보고 취향에 맞에 물을 보충하면 됩니다.


다음 단계로 가려면 다른 추출 도구도 사보고, 비싸고 성능 좋은 그라인더를 사고, 마침내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여놓기도 하겠죠. 그러나 입문자라면 모카포트, 프렌치 프레스, 드리퍼와 주전자 정도의 장비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만든 커피에 입맛이 길들여지면 사 먹는 커피로 만족하지 못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고 제대로 홈카페 장비를 갖춰놓은 사람들을 부러워 하면서 차차 장비 욕심이 생기게 되죠. 원두의 맛을 구별하게 되고 유명한 바리스타의 레시피를 찾아보게 될 겁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다 밟아온 과정이거든요. 이 모든 건 단순히 한잔의 커피를 위한 것이 아니랍니다. 무료한 일상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즐거운 취미인 동시에 자신만의 커피 취향을 찾아가는 여행이에요. 여행은 늘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게 좋습니다. 독자님들도 집에서 자신만의 커피 여행을 떠나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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