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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Dec 18. 2022

생존은 처절하게

코로나 블루의 기록 Day 5

    대자연의 날이 찾아왔다. 외부에서 침략한 코로나 바이러스와 대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자궁은 눈치 없이 생리를 시작했다. 불쾌함이 솟구치면서 한편으로는 '나 아직 살만한가 보다'라는 생각이 든다. 면역체계가 최전선에서 바이러스를 방어하는 한편 내 뱃속 아기집은 여느 때와 같이 생명을 잉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번 달도 공쳤다며 애써 쌓아 놓은 내벽을 무너뜨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목구멍이 많이 부어 침조차 삼키기 힘들지만 여전히 배는 고프다. 최대한 부드러운 음식을 찾아 먹어보지만 죄다 목구멍에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 일단 시고 맵고 자극적인 것들은 다 패쓰. 부드러운 죽이나 먹어볼까 하지만 작은 알갱이도 거슬린다. 입에 달고 부드럽다고 해도 목구멍에 부드러운 건 아니었다. 군고구마 한 입을 평소보다 두배는 꼼꼼히 씹고 곤죽이 되도록 침과 섞어 삼켜도 목이 아프다. 이것저것 시도해본 결과 쌀국수나 우동같은 따끈한 국물과 매끈한 면발이 있는 음식이 그나마 삼키기 수월했다. 그마저도 괴로울 때는 뽀얀 고깃국물을 먹으면 조금 기운이 난다. 뭐라도 계속 밀어 넣어야 나의 면역 세포들과 망가진 점막을 재생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전쟁의 최우선은 아군을 먹여 살리는 보급이다.


    내 처지가 꼭 아귀가 된 것 같다. 불교 탱화에 보면 배만 불뚝하고 목은 실처럼 가늘어 계속 굶주린 채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귀신이 나온다. 나는 조여드는 목구멍에도 뭐라도 꾸역꾸역 삼켜대는 아귀 같다. 이것도 다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이다. 코로나든 식중독이든 독감이든. 아무리 아파도 먹어야 살고 먹으면 산다. 입에 음식을 넣고 삼키는 순간 몸의 생존본능 스위치가 탁! 켜지는 것만 같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더라도, 가령 남자 친구와 헤어지거나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떨어졌어도 밥은 거르지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그 어떤 슬픔이나 좌절도 사는 일보다 절박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입맛을 잃고 곡기를 끊는 일 따위는 없었다. 첫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도 난 밥만 잘 먹었고 그 순간이 매번 나에게 힘을 준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내가 먹고사는 일보다 중요하진 않다.' 퉁퉁 부은 눈으로 밥숟가락을 드는 선택으로 난 평생의 우선순위를 정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사는 것'이라고. 사랑은 '나' 다음의 문제이다.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도 나는 내가 질긴 목숨줄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을 것을 안다. 그러니 내가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죽고 싶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어찌해도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사는 동안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아마 나는 피치 못할 사고나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라면 심장이 뛰는 날까지는 살아남을 생각이다. 그렇게 질기게 살아남아야 세상이 변하는 것도 보고 인생이 뭔지도 배울 기회가 있지 않을까?


    오래간만에 심하게 아프고 나니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된다. 살면서 관계에서 지독한 좌절을 겪었다. 어렸을 때는 학교 폭력 피해자가 되어보기도 하고, 남자 친구들과의 관계는 늘 엉망진창이었다. 가족들과 많은 갈등을 겪고 가까스로 상처를 봉합해 '가족다운 가족'이 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꿈이 많았던 만큼 좌절과 실망도 많았다. 믿었던 사람한테 사기나 배신도 당해보고, 위험천만한 사이비 종교에 홀려 본 일도 있었다. 무모하게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겠다고 떠났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여전히 삶은 녹록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 우아하게 살지는 못했어도 떳떳하게는 살았다. 


    목구멍이 찢어져도 밥알을 밀어 넣어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살아남아야 실패에서 만회할 기회도 얻고 과거의 슬픔을 보상받을 날도 올 테니까. 아파도 시간이 지나면 낫게 되어 있다. 코로나로 죽을 것 같았어도 5일 차가 되니 제법 괜찮아진 것 같다. 목이 아파서 제대로 못 먹는다고 투덜댔지만 몸무게는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동안 알음알음 잘 챙겨 먹었던 모양이지. 내일은 오래간만에 국이나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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