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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Apr 24. 2023

좋아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네

보수동쿨러의 <제임스>

 고등학생 때였나? 혼자 빈 노트에 끄적끄적 소설을 적곤 했다. 직접 볼펜으로 삽화를 그려 넣고 나름 챕터 1과 2도 나눠서 그럴싸하게 편집했다.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소설이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주인공 은아는 어머니가 없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소원했고 형편도 넉넉지 않았다. 아버지는 궂은일을 하고 집에 오면 매일 술을 마셨다. 성장기의 은아는 부모의 정을 모르고 살았다. 성인이 된 후 마음속 외로움을 묻고 혼자 살았던 은아는 어느 날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말기암이라 아버지는 선고를 받은 뒤 한 달 만에 돌아가신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은아는 혼자 영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은아에겐 첫 해외여행이었지만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곳은 불편해서 혼자 공원에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 공원에서 늘 마주치는 기타 치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한국어를 못하는 남자에게 은아는 짧은 영어로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깊고 푸른 눈을 가진 남자는 언어가 아니라 가슴으로 은아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이야기는 미완성이라 이후 은아와 영국에서 만난 낯선 남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디어가 떠올라 무작정 소설의 첫 문장부터 써내려 가기 시작했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영국의 풍경을 묘사하는 일이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때는 은아와 남자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정의할 수 없는 경계의 감정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정작 글을 쓰는 나도 경험한 적 없는 감정이었다. 몇몇 부분이 막히고 나니 어느새 흥미를 잃어버려 결국 미완성인 채로 잊고 살았다. 


 어느 날 늦은 시간에 카페 마감을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가고 있었다. 늦겨울 추위가 남은 조용한 밤이었다. 에어팟으로 밴드 보수동쿨러의 <제임스>라는 곡을 듣는데 문득 이 소설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33살이고 그 소설은 17살에 쓴 것이다. 노래의 분위기가 16년 전 기억을 불러낸 것이다. 


 17살의 난 쓰다만 이야기에서 이 노래가 전하는 감정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쩐지 쓸쓸하지만 다정한 노래의 분위기 속에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알았다. 누군가의 존재로 채워지는 외로움과 뒤늦게 헤아리는 사랑에 대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이해할 수도 경험한 적도 없는 감정과 관계였다. 그럼 지금은 못다 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지금은 뒤늦게 깨달은 사랑의 감정도,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 있는 모호한 관계도, 누군가의 존재로 구원받는 사람의 마음도 알고 있다. 16년의 세월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항상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왔다. 그런데도 이것을 '좋아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다. 한때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기도 했고 판검사 같은 법조인이 되고 싶기도 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가 '먹고사는 일'이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먹고사는 일은 좀 더 안정적인 벌이가 있고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싸한 일이어야 했다. 어쩌면 남들의 시선에 휘둘려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늘 글을 써왔기 때문에 정작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걸 몰랐다. 마치 늘 숨을 쉬는 사람은 산소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고 직업을 가지는 목표 속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깨닫지 못했다. 아무런 삶의 목표도 없을 때 자연스럽게 다시 글을 쓰게 되었고 세상에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이 삶의 일부가 되고서야 내가 늘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가 31살. 그러니까 자신을 알아가는데 이만큼의 방황이 필요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렇게나 나 자신을 모를 수 있나.


 얼마 전 어머니는 나에게 독서지도사가 되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도 좋아하니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본 후에 거절했다. 


    "엄마, 난 나를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어."


 어머니는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응원해 주셨다. 아직은 다 쓰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https://www.youtube.com/watch?v=Wjy8h_OkCnc


<제임스>-보수동쿨러

I'm like a bubble

floating on the railroad

When I walked into the fog

나는 안개 속으로 걸어갈 때 

철도 위에 떠다니는 거품과 같아


My lover was a savior

Tell me what you know

내 연인은 구원자였어

네가 아는 것을 말해줘


When we cry 

I could let you go

and I could die

우리가 울 때에 보낼 수 있고 죽을 수 있어


Tell me what you've seen

In my eyes

내 눈 속에서 본 것을 말해 줘


Would you like to dance?

At the never ending party maybe

아마 끝나지 않을 파티에서 춤추지 않을래?


I'm a sand grain unseen on the floor

when I walked into the sea

난 바다로 걸어갈 때 보이지 않는 모래알 같아


My lover was a savior

Tell me what you know

내 연인은 구원자였어

네가 아는 것을 말해줘


When we cry

I could let you go

and I could die

우리가 울 때에 보낼 수 있고 죽을 수 있어


Tell me what you've seen

In my eyes

내 눈에서 무엇을 봤는지 말해 줘


Would you like to dance?

At the never ending party maybe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을 파티에서 춤추지 않을래?


I'm a flower pot with no soil nor sunlight

when I walked out from the fire

난 불속에서 걸어 나올 때 흙도 햇빛도 없는 화분 같아


My lover was a savior

Tell me what you know

내 연인은 구원자였어

네가 아는 것을 말해줘 


When we cry 

I could let you go

and I could die

우리가 울 때에 보낼 수 있고 죽을 수 있어


Tell me what you've feel

In my eyes

내 눈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말해줘


Would you like to dance?

At the never ending party maybe

아마 영원히 끝나지 않는 파티에서 춤추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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