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모두 가슴 속에묻은 말이 많다.
L의 형제 자매들은 일단 이렇다. L이 첫째 딸이고, 둘째는 아들, 셋째는 딸, 넷째도 딸, 다섯째도 딸 그리고 막내 아들. 이중 첫째, 둘째, 다섯째, 막내는 아버지를 닮아서 키가 작고 각진 턱이 야무지게 생겼다. 셋째, 넷째는 어머니를 더 닮아서 늘씬하고 얼굴도 갸름한 편이었다.
육 남매를 키우는 것도 벅찼으나 L의 어머니는 항상 마음속에 아들 하나를 더 품고 살았다. L이 태어나기 1년 전 먼저 태어난 첫아들 하나. 젖먹이 일 때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서 허망하게 보냈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이었으나 여린 생명에겐 더 가혹한 굶주림이었으리라. L의 어머니의 마음속엔 그것이 영영 지워지지 않은 한으로 남았다. 그가 30대부터 매일 밤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릴 때는 육 남매의 이름 하나하나 부르고 마지막에 먼저 간 아들도 잊지 않고 불렀다.
부처님 관세음보살...
우리 아들 좋은 부모 밑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늘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게 부처님이 살펴 주십시오.
불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수만 개의 눈과 수만 개의 귀를 가지고 있어서 중생의 울부짖음을 들어주는 부처라고 했다. 관세음이란 말도 세상을 보고, 듣는다는 의미다. 그러니 매일 밤 자식들의 안녕을 비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모른 척하실리 없다.
그렇게 아들 하나를 마음에 묻고 다음 태어난 L은 살림밑천이라 부르는 장녀 역할을 했다. 옛말에 장남 장녀는 하늘에서 내려준다 했는데, 어쩌면 L은 원래 차녀의 운명이었으나 뭔가 일이 꼬여 장녀가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래서인지 늘 어머니에게 서운한 게 많았으나 일일이 다 뱉어 본 적은 없다.
가장 서운한 것은 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걸 보고 자랐어야 했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의 싸움은 세계대전과 마찬가지이니까. 아이들에겐 부모가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지 않은가.
L이 못내 불안정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유년기의 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L은 자신의 감정을 보듬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걸 잘하지 못했다. 항상 속에서 꿍하게 뭉쳐 두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터뜨리곤 했기에, 차라리 예술에 격정을 쏟아붓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집에 소홀한 사이 동생들을 돌보며 엄마의 무게를 나눠진 아이가 안쓰러웠다.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었기에 돈이 많이 드는 미대를 가겠다며 고집을 피워도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육 남매 중에 대학에 간 것은 첫째인 L과 다섯째 딸, 막내아들뿐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미대를 갔으니, 학교 미술 선생님이 되어 안정적으로 살면 좋으련만. 이 고집 센 딸은 그마저도 싫다 하고 졸업하면 대학원에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고집은 지 애비를 닮은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웬 남정네 하나가 집까지 찾아오게 하고 그게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났으니, 이거 원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나 있어야지. 자기 어머니가 나름 동네에선 한가닥 하는 호랑이 반장인데, 딸내미 대학 보냈다고 뒷목 빳빳하게 펴고 다니는 것도 이젠 못하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지. L은 곧 있을 등산대회에 후배들에게 가져갈 선물로 고민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여고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곤 했다.
작년엔 김밥을 말았다고 들었으나, 그게 텁텁한 날씨에 쉬어 버려 못 먹게 되었다고 했으니 뭔가 다른 수를 내야 했다. 그래서 모두가 의견을 모은 것이 꼬치에 꿰는 어묵이다. 준비할 때야 품이 들겠지만 팔팔 끓여서 내면 쉬지도 않을 테고, 가을이라도 저녁 무렵은 제법 쌀쌀하니 딱 좋은 선택이다 싶은 거다.
80년대에 여대에 다니는 학생들이야 다들 집에서 귀한 딸, 야무진 딸일 테니 어묵 꼬치 몇백 개 꿰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명절에 모여 전을 부치는 어머니처럼 동아리 방에서 어묵을 꿰다 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주제는 남자들 이야기였고, 그중 제일 핫이슈는 L과 P의 연애사였다.
그래서 너 그 선배 계속 만날 거야?
그 선배가 집 앞에 와서 울었다던데
진짜? 의외로 감상적이네?
너무 울어대니까 동네 사람들이 구급차 불렀대잖아
야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원래 안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은근히 매달려. 네가 남자를 몰라서 그래.
뭐 나도 남자를 아예 모르지는 않거든?
하이고... 네가 퍽이나. 조신하게 살다 선봐서 결혼할 거라며?
말들이 계속 번지면서 점점 사실과는 다른 드라마가 펼쳐질 동안, L은 한마디도 않고 어묵이나 꿰고 있었다. 원래 이런 판에 함부로 발 들이면 크게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일이 아닌 척, 모르는 척 잠자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심 P가 나에게 매달린다는 소문이 돌아도 내가 손해 볼 건 없다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소문이 나길 은근히 기대하는 지도 모른다.
그쪽 어머니가 전화하셨다면서?
세상에, 이대로 상견례하는 거 아니야?
우리 중에 제일 먼저 시집가겠네!
얘, 그 선배는 너한테 전화 안 했어?
호들갑 떠는 수다 중에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다. '그쪽 어머니 반응 말고, 그 남자는 너에게 뭐라고 하던?' 그런 질문에 L은 "뭐, 으응.."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말들이 저절로 굴러가며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두고 은근슬쩍 자리를 옮겼다. "어묵이나 더 가져올게."
P가 처음 술에 취해 집 앞에 찾아온 지 2주가 지났고, P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전화가 온 지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P는 전화도 없고, 이젠 집 앞으로 찾아오지도 않는 것이다. 이번엔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겠다던 L도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쯤 전화가 오면 못 이기는 척 만나주려던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갔다.
'이걸 전화를 걸어 말어?' 속으로 저울질을 해봐도 뾰족한 수는 없고, 친구들은 저들끼리 말을 보태며 아주 신이 났다. 한 구석에서 혼자 뾰로통한 L의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L도 자기 마음을 모른다. 괘씸하고 미운데 보고 싶고 궁금하고 그렇다. 사랑은 원래 이렇게 복잡한 건가? L은 서투른 첫사랑에 완전히 헤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