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L의 사랑,아홉 번째

9. 여자들의 무리와 남자들의 무리

by 구름조각

L은 여중, 여고, 여대를 다녔고 P는 남중, 남고, 여자가 한 명도 없는 공대에 군대까지, 둘은 아주 여탕과 남탕 출신들이다. 그러다 보니 L의 주변에는 늘 여자들의 한 무리가 있었고, P의 주변에는 남자들의 한 무리가 있었다. 어쩌면 전혀 만날 일 없던 두 사람 사이에 겹치는 다리는 산악회가 유일하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첫 연애 상대로 만나 사랑을 하다 보니 L은 남자를 너무 몰랐고, P는 여자를 너무 몰랐다.


누군가 L을 앞에 앉혀놓고 남자들은 단순한 걸 좋아하고 말 안 해도 다 알아주길 기대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줬어야 했다. 한편 P에게는 여자들의 변덕에 그럭저럭 맞춰줄 요령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 좋았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 시대에는 지금처럼 텔레비전에 연애 멘토가 나와서 센스 있는 멘트를 알려줄 수도 없어서 주변 선배, 친구들끼리 알음알음 지식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어 봤자 고만고만한 답이 나올 뿐이다.


등산 대회장에는 각 학교 대표와 그들을 응원하는 친구들과 후배들을 보러 온 선배들의 무리가 북적이고 있었다. 대회가 열리는 학교 입구 한편에는 번데기나 솜사탕을 파는 상인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저마다 가지고 온 안주에 술 궤짝을 꺼내어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술판의 중심에는 P와 친구들이 있었다.


아까 지나오면서 여대 산악회를 흘긋 봤지만, L은 이쪽으로 고개도 안 돌리고 분주히 짐을 나르고 있었다. '으음... 불편하다.' 주변의 친구들이 쿡쿡 찔러봐도 P는 그냥 술이나 마실 뿐이다. 술에 취해서 이 불편한 현실에서 도피해야겠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선배들에게 술을 받는 족족 들이키면서도 저쪽이 신경 쓰였다.


쪼매난게 자기 몸통만 한 솥을 들고 낑낑 대고 있다. 큰 솥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서 얼굴이 잘 안 보였다. 어묵을 한 아름 가지고 가는 L의 뒷모습이 뒤뚱뒤뚱. L이 걸을 때마다 뽈뽈뽈뽈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내가 지금 많이 취했나?' 그러면서도 P는 종이컵에 든 막걸리를 원샷했다. L은 뭔가 또 심통이 났는지 어묵 꼬챙이로 쿡쿡 냄비 안쪽을 찌르고 있다. L의 동기들은 이미 다른 술판에 합류했거나 후배들과 어울리고 있는데, 왜 혼자 어묵이나 끓이고 있는 건지... 역시 너무 신경 쓰인다.


그 시각 L은 퉁퉁 불어서 꼬치에 흐물텅 흘러나오는 어묵에 짜증이 났다. 좀 저렴한 어묵을 샀더니 끓는 물에 수제비 반죽처럼 불어 터지고 있다. '아이 짜증 나. 내가 좀 더 맛있는 거 사자고 말을 해도 꼭 싸구려를 고르더니...' 친구들도 짜증 나고, 어묵도 짜증 나고, 저어기서 술판 벌이고 있는 애들도 짜증 난다. L은 빠져나온 어묵을 어떻게든 솥 안에서 다시 꿰어보려고 육수를 꼬치로 휘젓고 있었다.


가서 말을 걸어 보든가.
뭐를?
저어기, 저기 말이야.
아 됐고. 술이나 마셔.

아직 해도 안 넘어갔는데 P와 동기들은 얼굴이 벌겋게 취했다. 조금만 더 마시면 여기저기서 토하고 시끄럽게 언성을 높이는 애들이 있을 것이다. P의 술버릇은 취하면 취할수록 술을 더 마시는 거다. 주량도 모르고 술이 술을 먹는 셈이다. 그래서 술판에서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편이었지만, 그게 맨 정신 일리는 만무하다.


그때 L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회가 열리는 학교 뒤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걸 본 P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욱, 이미 술이 목구멍에서 찰랑이는 것 같다.

오오, 드디어 가나?
화장실 간다.
선배 어디 가시는데요?
넌 몰라도 돼, 인마!
예?

P의 제일 친한 친구는 그저 이 상황이 재밌기만 했다. 저 무딘 놈이 어떻게 헤어진 여자를 다시 꼬셔올까.

건투를 빈다.
새끼... 조용히 좀 해라.

화장실에 갔던 L은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다. 대회장 구석에는 누군가 작게 불을 피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덜 마른 나무장작에 불이 붙다 말았다. 젖은 장작불에는 깊은 숲 속에서 나는 나무 냄새와 매캐한 연기 냄새가 섞여 있다. 찬 공기가 필요해서 왔는데, 이런 연기 냄새는 불쾌하기만 하다. 저기 멀리서 친구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신들이 나셨구먼' 저 안에는 술에 잔뜩 취한 P의 웃음소리도 섞여있는 것 같다.


그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P가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나던 연기 냄새가 다 덮일 정도의 술냄새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마셨다.
얼씨구... 술 많이 마셔서 좋겠네? 또 술 먹고 집 앞에 찾아오게? 맨 정신으로는 못 오나 보지? 자기네 엄마가 나한테 전화한 건 아나? 알고도 여기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어?

공대생인 P는 수학적 계산과 논리적 알고리즘이 중요한 사람이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술 취한 머리가 삐걱, 삐걱 작동 오류를 내고 있다. 그리고 술에 취해 혼미한 정신으로도 저게 그냥 질문이 아닌 건 알겠다. '화가 났나? 뭐부터 대답해야 되지? 지금 기분이 좋다고 대답해야 하나?' 고장 난 머리로는 올바른 답이 출력되지 않았다.


침묵. 대치상황. 질문에 돌아오지 않는 답. 술냄새와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L은 약이 바짝 올랐다.

어쩔 거야?
뭐를?
뭐어르을?

'아니 근데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괜히 마음이 상해서 P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얘는 쬐깐한게 왜 이렇게 사나워?' 둘 사이에 쉬익 쉬익 숨소리만 들렸다. L은 화가 나서 쉬익 쉬익, P는 술 취해서 쉬익 쉬익.


그때 멀리서 P의 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59기 선배님들 오셨어. 너 찾는데 빨리 와!"

가자.
어디 가?
같이 가자고.

손을 덥석 잡고 끌었다. P는 언제나처럼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L은 툴툴 대면서도 손을 놓지는 않았다.

뭐, 미안하다거나, 앞으로 잘해보자거나... 그런 말 없어?
미안할 게 뭐가 있는데?

'아이고 잘나셨어.' 이번엔 다행히도 빈정대는 말은 속으로 묻어 두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타나자 술판 분위기가 화끈해졌다. "야야! 둘이 다시 사귀냐악!?" 술 취해서 인사불성인 동기들은 제쳐 놓고, 퇴근하고 들른 졸업한 선배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네 여자 친구냐?
아, 예. 뭐...

곤란한 질문에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P와 L이 서로 닮은 부분이다.


L은 P의 옆에 앉아 졸업생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고, P는 그런 L의 손에 든 잔을 뺏아가서 대신 마셨고, L은 그 잔을 뺏어와서 다시 술을 가득 따라 마셨다. 그렇게 둘 사이는 얼렁뚱땅 넘어가기로 했다. 할 말이 많았지만 술에 취하니 다 생각이 안 난다. 술기운이 잔뜩 올라오니 다 같이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그 분위기에 P와 L도 마주 보고 실컷 웃었다.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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