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그 손은 참 따뜻했었네...

나의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

by 구름조각

내가 태어났을 때쯤 24살, 26살의 젊은 부모님은 외할머니 집에 함께 살았다. 갓 대학을 졸업한 철없는 신혼부부가 아이를 혼자 키우기엔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어머니, 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삼촌 둘에 이모 5명에다, 5분 거리에 살던 증조할머니큰엄마 할머니까지 여러 사람의 손에서 자랐다.


91년 생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묘하게 예스러운 취향을 가진 것은 이런 대가족이 북적이는 풍경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막내 삼촌이 불과 13살일 때 내가 태어났고, 온 식구들의 관심을 받고 자랐다. 그 덕에 난 말이 아주 빨라서 돌잔치쯤엔 문장을 다 말할 수 있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낯가림이 없는 성격으로 어른이 되었다.


김장철엔 온 가족이 모여 200포기의 김치를 담았고 수육에 어묵탕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하면, 어묵탕을 곰국 솥에는 끓여야 모두에게 한 그릇씩 돌아가는 풍경. 그 커다란 어묵 솥에는 뚝뚝 끊어 넣은 가래떡과 붉은 꽃게도 두어 마리가 끓고 있었다. 그런 유년기의 여러 추억 중에도 가장 따스했던 건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증조할머니에 대해서 기억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곱게 쪽진 머리가 생각난다. 긴 백발을 쪽지고 쇠로 만든 비녀를 꽂으셨는데, 어렸을 때 할머니의 비녀를 만져보면 제법 묵직했던 기억이 있다. 노인의 손은 주름지고 거친데, 증조할머니의 손은 퍽 다정하고 따듯했었다. 그 손으로 내 뒤통수를 만져주시면서 뒤통수가 예쁘니 빨리 시집보내야겠다는 말을 하시곤 하셨다. 도대체 뒤통수가 예쁜 것과 결혼이 무슨 상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외할아버지는 정확히는 증조할머니의 둘째 아들이셨다. 내가 큰엄마 할머니라고 불렀던 분은 할아버지의 형님의 부인이시고, 그의 남편은 한국전쟁 중에 돌아가셨다. 큰엄마 할머니는 자식이 없어서 외할머니의 육 남매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면서 증조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어머니도 모시고 살았다. 엄마의 형제 중 셋째, 넷째, 다섯째는 큰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간이 자신의 어머니와 살았던 시간보다 더 길다고 했다.


증조할머니큰엄마 할머니와 이모들이 살았던 집엔 마당에 감나무가 있었고 가을이면 감을 깎아서 햇볕에 곶감으로 말려놓곤 했다. 그렇게 말린 곶감들은 거의 대부분 내 간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맛난 간식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덜 마른 곶감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기도 했는데, 덜 마른 곶감은 약간 겉은 마르고 속에는 수분이 남아서 묵직한 물풍선 같은 느낌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큰엄마 할머니는 계란을 하나 부쳐서 간장에 참기름을 넣고 비빈 계란 간장밥을 자주 만들어 주셨다. 그러면 증조할머니께서 내 입에 한 숟가락씩 떠 넣어주시고 난 아기 참새처럼 쏙쏙 받아먹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꽤 응석받이였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버터나 마가린을 넣은 계란 간장밥을 만들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갓 짜낸 고소한 참기름이 들어간 계란 간장밥이 유일한 기준이다. 유년기에 생긴 맛의 기억은 평생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 시절에도 흔치 않게 증조할머니장례식은 집에서 치러졌다. 남자 어른들은 삼베옷을 입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고, 여자 어른들은 정신없이 전을 부치고 육개장을 끓이던 풍경. 그때 내가 6살이었나 7살이었나. 난 할머니의 장례식을 무슨 잔치처럼 생각해서, 대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누군가 들어오면 "손님 왔어요."라며 명랑하게 뛰어다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나에게, 할머니는 선녀와 함께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아 그렇구나.' 어렸던 난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날, 증조할머니는 새벽에 깨서 화장실에 한번 다녀오셨다. 배가 아파서 잠이 안 온다고 하시기에 큰엄마 할머니도 잠에서 깨서 배를 문질러 드렸다. 그러다 갑자기 푹 고꾸라지시더니 숨을 헐떡이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 새벽에 외할아버지가 전화를 받고 후다닥 뛰쳐나가는 소리를 듣고, 엄마도 뭔가를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슬리퍼를 신고 뒤따라 갔다.


엄마는 사람이 죽을 때 숨을 거칠게 헐떡인다는 걸, 그리고 그 소리가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직접 목격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거칠게 숨을 몰아 쉬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엄마는 증조할머니의 팔다리를 연신 쓰다듬어 드렸다고 했다. 큰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귀에 이승에서 생긴 한을 다 잊고 편히 가시라 속삭여 주었다고 한다.


후에 죽음에 대한 글을 하나 읽었는데, 인간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감각은 청각이며 시각, 미각, 후각, 촉각, 청각 순으로 하나씩 감각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증조할머니께서도 가족들이 눈 앞에 보이지 않고,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고, 익숙한 집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자기의 몸을 절박하게 주무르는 손녀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도 이승의 한은 다 내려놓고 가라는 며느리의 목소리는 들으셨을 것이다.


모두가 호상(好喪;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이라 했다.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신 것도 아니고, 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아들과 며느리와 손녀의 품에서 삶을 정리하셨으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살면서 고생을 하시더니 마지막에 복을 몰아서 받으셨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전쟁을 경험하고 큰아들을 먼저 보낸 그 삶이 결코 편안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가끔 증조할머니께서 나를 보시던 눈빛이 슬퍼 보였던 건 그리운 자식이 있었기 때문일까. 내 무의식 속에는 그 다정하고 처연한 눈빛이 새겨져 있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떠오를 때가 있다. 오늘 아침이 그렇다. 일찍 깨어나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에 증조할머니의 눈빛이 생각났다. 조금 눈물이 났다. 그 사랑은 다시는 받아볼 수 없는 귀한 것이었음을, 늘 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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