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L의 사랑,열 번째

10. 헤어짐은 늘 예고 없이찾아온다.

by 구름조각

다시 만난 후로는 둘의 관계가 조금 다른 느낌이 되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한 번의 헤어짐 후에 느꼈던 그리움이 조금 더 사랑을 진하게 만들어 준건지도 모르겠다. 낭만적으로 표현하면 그렇지만 싸우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미운 정이 들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서로 좋아서 만난다고는 하더라도 둘이 서로 이해하기 힘들 만큼 다른 사람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는 여전히 산악회 활동에 열심이었고 여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섬세한 재주는 없었다. L 또한 아르바이트나 학교 과제 등으로 바빴고 가끔 다른 학교와의 미팅에 나가기도 했다. 대학생이나 되었으니 미팅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지만 남자 친구가 버젓이 있는데도 미팅에 나가는 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 부분에서는 30년이 지난 지금 둘의 기억이 완전히 다르다. P는 L이 미팅에 나간 건 자신과 사귀기 전이라고 말하고, L은 사귄 후에도 미팅에 나갔으나 미팅에 갈 때마다 간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 P가 사귀는 여자 친구가 미팅에 나가는 걸 허락할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둘이 결혼 후에 L이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첫사랑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뚱하게 있던 P가 동창회 뒤풀이에 말도 없이 등장해 술값을 계산하고 갔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입지도 않는 검은색 코트를 꺼내 입고 동창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일일이 눈도장을 찍으면서 자신이 남편이라고 인사를 한 건 분명 견제구를 던지는 투수의 신중함과 같은 것이다. P는 대놓고 질투를 하는 타입도 아니지만 넋 놓고 있다가 자기 것을 빼앗기는 타입도 아니다.


어쨌든 둘은 여느 대학생 커플들처럼 연애를 했다. 알콩 달콩과 사랑싸움을 넘나들고 때로는 함께 등산을 하고 고생스러운 추억을 쌓으면서 친밀감을 쌓아갔다. 그렇게 겨울이 되었고 P는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언젠가는 받을 입영통지서였다. 그나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3개월 감면받아서 27개월 동안만 복무한다는 게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P는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L은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다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군대에 간다는 건지. 팔자에도 없을 고무신 노릇을 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군대 가기 전의 심란한 마음을 술로 풀곤 했다. P가 동기들과 선배들과 어울려 술독에 빠져 사는 사이 L도 덩달아 술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술 좋아하는 남자 친구랑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려면 술자리에라도 가야 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집에 데려다주는 그 짧은 시간이 유일하게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기다릴 수 있나?
하는 거 봐서...

혼잣말인지 뭔지. 넌지시 던져보는 P의 말에 L은 퉁명스럽게 대답할 뿐이었다.


P가 훈련소에 입소하는 날에는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라고 했고, 자대 배치를 받은 이후에 한번 면회를 갔다. 그때 산악회 동기들과 함께 면회에 가면서 김밥을 준비해 갔다. P의 어머니는 김밥까지 준비해서 아들 면회에 간다는 아들의 친구들이 고맙고 기특하기만 했다. 김밥에 들어갈 야채는 필요한 만큼 맘껏 갖다 쓰라며 가게 한편에 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때 아들의 여자 친구를 처음 만났다. 몸집은 좀 작았지만 김밥을 말아 쥐는 L의 손끝이 야무져 보이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L은 전화로만 인사드렸던 P의 어머니가 영 어색하긴 했다. 가만히 얼굴을 뜯어봐도 닮은 구석이 없어서 P는 아버지를 더 닮았나 싶었다. 그때 어머니가 다들 고생한다며 살색 요구르트를 하나씩 건넸다. 눈을 한껏 접어 웃으면 길게 늘어지는 눈꼬리가 P의 눈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날 L은 집에 가서 P에게 보낼 편지에 한 줄을 더했다.


어머니랑 닮았더라.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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