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록들이 주는 의미

우리 비록 이름은 남길 수 없어도 노트 한 권은 남겨봐요.

by 구름조각

예전에 무료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적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수업의 방향성이 내 생각과는 너무 달라서 금세 시들해졌긴 했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있다.


첫 수업에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왜 나는 글을 쓰는지에 대해 발표했는데 한 중년의 남성분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쓴다"라고 한 것이다. 자신이 죽고 자녀들도 죽고 나면 자신의 삶을 기억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자신의 삶을 남겨보려 한다고 했다. 그분에게 죽음이란 완전히 잊히는 것이었다.


그 말이 오랫동안 내 마음 안에서 파문을 일으켰던 건,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의 기록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거라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존재라는 건 알았으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 않는 한 우리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그건 영웅호걸이나 위대한 지도자의 이야기다. 평범한 우리는 이름의 한 글자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고유한 영속성

어쩌면 유교에서 내세관이나 천국, 지옥의 개념이 없는 것도 세대를 이어 나가는 영속성을 인간의 삶으로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의 뜻이 자식에서 자식으로, 그렇게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잊히지 않음으로써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개념. 그런 세계관이라면 죽은 이를 기리는 제사가 중요하고 대를 잇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게 족보에 올린 이름 석 자 지켜내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을 영원히 사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평범한 나도 후손들에겐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누군가를 평범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나라는 사람이 살아온 시간 또한 밖에서 보면 평범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고유한 생각과 감정으로 다채롭게 빛나는 삶이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 가족들, 친구들 또한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복잡한 그들의 사정과 사연이 있는 법이다. 사람은 들여다볼수록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다. 난 한 명의 유일무이한 삶, 한 명의 고유한 삶이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밖에 없다.


▶ 그런 보통 사람의 고유한 삶을 영속적으로 남길 수는 없을까?


▶ 이렇게 우리의 삶은 가치 없는 것으로 버려져 먼지처럼 흩어져야 하는가?


▶ 기록이란, 대단한 정복자나 빛나는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영광일까?


기록을 남기는 이유

내가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은 위의 고민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 보통 사람의 고유한 삶도 후대에 이어질 수 있다.


▷ 우리의 이야기는 가치 있고 보존될 필요가 있다.


▷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하고 남들이 손뼉 칠 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의 삶도 기록될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지만

세상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나의 어버이에 대한 기록과 나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는 것 같다. 나의 부모도 남들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지만, 가까이서 그들을 본 나의 눈에는 용감한 영웅이고 지헤로운 현자와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나의 삶도 들여다볼수록 모험과 역경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 대단한 업적은 남길 수 없어도 노트 한권은 남기리라는 각오로 글을 쓴다.



삶의 신비와 진리를 연구하는 신지학의 개념 중에 아카식 레코드라는 것이 있다. 우주의 아카식 레코드에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아카샤는 허공, 우주, 하늘을 가리킨다. 인류와 우주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담은 하늘 도서관인 셈이다.


우리의 삶을 아카식 레코드에 남기듯이, 이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 남겨 놓으면 어떨까. 이곳은 워낙 넓으니 우리의 짤막한 인생사를 한 귀퉁이에 새겨놔도 큰 민폐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드넓은 바다에 유리병 속에 담은 편지를 띄우듯이 누군가에게 내 삶이 읽히고 기억되길 바라는 것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한 사람의 말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은 것처럼 나의 삶도 어떤 이에게 의미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이 바다에 띄우는 유리병 속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이걸로 하겠다.


내 그리 대단한 업적을 이루진 못했으나
한바탕 꿈결 같은 삶을 살다 간다오.

그대도 곧 나와 만날 것이네.

그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 주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밥벌이가 아니어도 일은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