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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n 15. 2023

가장 숭고한 사랑의 이야기

이승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 고개가 휙 돌아갔다. 현수막에 흔치 않은 단어가 적혀있었다. "노년 여성의 건강한 성행활을 위한 강좌" 노년. 여성. 성생활. 세 단어가 한 문장에 들어있다니.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2002년에 개봉되어 대단히 화제가 되었던 영화 <죽어도 좋아>가 떠올랐다. 그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는 것만 알뿐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검색해 보니 영화 <죽어도 좋아>는 박진표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다. 66년생인 박진표 감독은 10년간 다큐멘터리 PD로 일하던 중 <죽어도 좋아>를 제작했다. 35~36세 무렵 이런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하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그는 어떤 이유로 노년의 사랑을 주제로 삼았던 걸까? 다큐멘터리 PD이력 덕인지 실제 인물이 등장하고 다큐멘터리 같은 연출을 보여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성애 장면을 찍은 과정도 놀라운데 카메라 하나만 덩그러니 두고 감독은 집에 가버렸단다. 평소대로 하시되 찍히는 게 불편하면 문을 닫으라고 쿨하게 떠났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구만......."


 호기심이 이어졌다. 박진표 감독은 2006년 다큐멘터리 <너는 내 운명>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너는 내 운명>은 시한부 암환자였던 서영란 씨와 그녀를 돌보는 정창원 씨의 마지막 한 달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였다. 이 다큐멘터리를 담당했던 유해진 PD와 정창원 씨는 69년생 동갑이어서 친구가 되었다.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후에도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며 안부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유해진 PD의 개인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창원 씨의 근황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주르륵 눈물이 났다.


 여기까지가 이 글을 쓰게 된 과정이다. 어느 날 시선을 잡아챈 현수막에서 영화 <죽어도 좋아>로, 영화의 감독의 이력을 살펴보다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로, 그 다큐멘터리 PD의 블로그를 살펴보다 슬픈 눈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그 남자의 이야기를 가사로 쓴 노래 한곡까지. 스쳐가는 호기심이 한 편의 글이 되기까지. 생각은 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제멋대로 자라난다.

 이 다큐멘터리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진주 교대에 다니던 여대생 서영란 씨는 9살 연상의 정창원 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영란 씨 가족들의 반대에도 사랑을 이어갔지만 안타깝게도 영란 씨는 20대 후반에 간암 말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창원 씨는 영란 씨의 간병을 위해 가지고 있던 집도 다 팔고 간병에만 매진한다. 죽기 3개월 전 혼인신고를 해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병원에서 결혼식을 하려 반지도 사고, 가발과 하얀 웨딩드레스도 준비했지만 갑자기 영란 씨의 병세가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다 떠났다.


 여기서 멈칫. 한 사람의 인생과 절절한 사랑을 이렇게 몇 줄의 글로 전하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사랑을 담기에는 내 글솜씨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서영란과 정창원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창원 씨는 방송을 통해 모인 모금액을 전부 국립 암센터에 기부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후 이승환은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라는 곡을 쓰기도 했다. 공동 작곡가인 황성제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치지 않으려 3개월간 가사를 다듬고 고쳤다. 후에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다큐멘터리의 영상을 쓸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승환 씨의 매니저가 유해진 PD에게 연락했고, 유해진 PD는 창원 씨의 의사를 물었다. 창원 씨는 매우 신기해하고 흐뭇해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영란 씨의 의사를 물을 길이 없어서. 정중한 거절. 창원 씨의 마음에는 여전히 영란 씨가 살아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과 인연이 이어지고 창원 씨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근황을 그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이런 인연들이 창원 씨가 홀로 남지 않게 지켜주는 것 같다. 유해진 PD의 개인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가장 최근 소식이 2022년 9월 6일로, 창원 씨는 속초에 머물면서 허리디스크 수술 후 재활 중이라는 근황을 알렸다. 잠깐 딴 길로 샜지만 그의 소식을 궁금해할 사람들이 있을 테니. 그는 여전히 영란 씨를 '집사람'이라고 부른다.

출처 : 유해진 PD개인 블로그

 2005년 영란 씨가 떠난 후에 창원 씨는 집을 잃은 사람처럼 이곳저곳 떠돌았다. 지리산에서 충주, 남도의 섬, 대구에서 또 울진, 2014년 11월에는 가평에서 리조트 일을 한다고 했다. 2019년 8월에는 대전에서 살면서 천안으로 전기설비일을 하고 2020년 4월에는 작업 현장을 따라 청주에서 전주로 2022년 9월에는 속초에서 허리디스크 수술 후 재활 중이라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창원 씨는 2~3년 간격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한 곳에 정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발 없는 새'처럼 평생을 유랑하듯 살아갈 모양이다. 자신이 머물 곳은 사랑하는 아내 영란 씨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뱃사람에서 농사꾼으로 화물운송에서 고기잡이로. 한때는 술기운에 기대어 지내기도 했지만 가끔 떠오르는 시상을 문자로 친구에게 보낸다. 그가 고르는 단어 하나하나가 맑고 다정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어떤 작가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면 다들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그건 당신이 그들을 충분히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당신의 게으른 관찰력이 모든 사람을 비슷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어떤 사소한 사람이라도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다 보면 눈물겨운 이야기 하나쯤은 남기 때문이다. 


 만약 창원 씨의 이야기를 모른 채 우연히 창원 씨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피부가 검게 그을리고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의 가슴에 이렇게나 눈물겨운 사랑이야기가 남아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사는 순박한 남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랑에 감동해서 한 가수가 길이 남을 명곡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 수 없었겠지. 그러니 누군가를 '평범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와 같은 뜻이다.


 그 작가와 대화한 후로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누군가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겨주리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남겨진 이야기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https://www.youtube.com/watch?v=W1HtwWMxTWk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이승환

사랑이 잠시 쉬어간대요 

나를 허락한 고마움 갚지도 못했는데 

은혜를 잊고 살아 미안한 마음뿐인데 


마지막 사랑일 거라 확인하며 

또 확신했는데 욕심이었나 봐요 

나는 그댈 갖기에도 놓아주기에도 모자라요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 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사랑한단 말 만 번도 넘게 백 년도 넘게 남았는데 

그렇게 운명이죠 우린 

악연이라 해도 인연이라 해도 우린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 있건 

다시 만나 사랑해야 해요 

그때까지 다른 이를 사랑하지 마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대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 

간절한 그리움 행복한 거짓말 은밀한 그 약속 

그 약속을 지켜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이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줄 내 사랑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이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줄 내 사랑


사진출처

유해진 PD개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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