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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바다시인 Jul 10. 2021

‘선배’라고 나를 불렀던 그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감성에세이] 청춘의 죽음에 관하여

그때는 하루하루가 바빴습니다. 힘들었던 사업 초기 시절이 지나고, 늘 더 힘든 일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회사의 매출은 부족했고, 발전도 더디었습니다. 그래도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그 시절,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교 같은 과 축구 동아리 동문으로 이뤄진 카카오톡 단체방에 ‘그 형이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다’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카카오톡 단체방에는 학과 축구 동아리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에 뛰었던 멤버들이 20명 남짓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단체방에서는 언제 병문안을 갈지에 대해 각자 의견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그 형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질문이 오갔습니다. 그 문자를 보면서 저는 단순 교통사고로 다행히 그 형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 형은 저보다 한 살이 많았으며, 한 학번 아래였습니다. 늘 저한테 ‘선배’라고 불렀죠.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그 형과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형과 일 년 내내 축구를 했습니다. 매주 목요일에는 축구 동아리 모임, 평일에는 풋살을 했습니다. 주말에는 학교 근처 조기축구회에서 공을 찼습니다. 이렇게 그해 축구만 했던 학과 멤버는 총 5명이었습니다. 저, 그 형, 그 형과 같은 학번이자 룸메이트 후배, 두 학번 후배 2명입니다. 저희는 대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도 자주 연락을 하고 지냈으며, 가끔 만나서 술도 한잔 했습니다. 그 형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2~3주 전에도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바쁘고 힘든 날들 속에서 유쾌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는 항상 대학 생활 흑역사(?) 이야기로 꽃을 피웠죠.      


며칠이 지나고 그 형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형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동아리 축구 멤버들과 함께 병문안을 갔습니다. 중환자실 앞에서 만난 이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차례대로 저희는 중환자실에 들어갔습니다. 제 순서가 와서 병상에 누워있는 그 형을 봤을 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늘 “선배”라고 부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의 얼굴만 떠올랐습니다. 차마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형의 상태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 호흡기를 뗄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축구 멤버들의 얼굴을 본 날은 그 형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화장터에서 그 형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진. 플리커

많은 죽음을 눈으로 봤지만, 젊은 사람의 죽음은 늘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제 삶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내일 죽더라도 난 후회가 없을까, 내 삶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면 난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 형의 죽음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업무에도 소홀했으며, 술자리가 잦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살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이 후유증은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도 몇 년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인생의 답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꿈, 희망, 명예, 돈 등 모든 것이 부질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는 죽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죽기도 하고, 사고를 당해 죽기도 하고, 병에 걸려 죽기도 합니다. 저희는  무수한 죽음의 고비 앞에서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내일을 그리워하며 죽은 이들의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삶의 답을 찾아서, 누군가는 삶의 답을 갖고서, 누군가는 삶의 답을 모른  살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글을 쓰면서 오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오늘 엄마한테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밥은ㅇ  먹고 대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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