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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바다시인 Jul 19. 2021

추억의 쌀 원정대, ‘책거리’를 아시나요?

[감성에세이] 섬마을 초등학교 책거리에 관한 추억

저는 연륙교가 놓여 있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마디로 ‘깡촌’이 제 고향입니다. 초등학교 한 학년에는 한 반만 있었죠. 같은 학년 친구들 집이 어디에 있는지 다 외울 정도였습니다. 학교 근방 3km 이내에 있는 마을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예전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죠.)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가장 큰 행사 중 하나가 ‘책거리’였습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학생이 책 한 권을 다 읽거나 베껴 쓰는 일이 끝났을 때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한턱내는 일을 말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식 날엔 반 친구들과 책거리를 했습니다. 이때 떡은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매번 방학식마다 학교 앞 방앗간에서 무지개떡 혹은 백설기를 주문했습니다. 백설기에는 마른 건포도가 필수입니다. 건포도는 밍밍한 떡을 달콤하게 만듭니다.     


책거리를 처음 했던 날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식 전날이었습니다. 일찍 하교한 저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책거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날, 고학년인 선배들은 책거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책거리는 초등학교 5학년 이상만 했을 때였습니다.


제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는 책거리 전통(?)이 있었습니다. 직접 반 친구들 집집마다 다니면서 떡을 만들 쌀을 거두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와 단둘이 마대 포대 하나를 들고 가까운 친구 집부터 쌀을 거두러 다녔습니다.  저희는 JTBC 예능프로그램 ‘한끼줍쇼’처럼 한 끼가 아닌 ‘쌀 한 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고 있던 친구들은 우리의 ‘쌀 한 줌 줍시오’에 합류했습니다. 저는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 속 주인공 같았죠. 그렇게 2명으로 시작한 ‘쌀 원정대’는 5명까지 늘었습니다. 몇몇 여자 친구들은 부끄러워하며 쌀을 한 움큼 포대에 넣었습니다. 그날, 저희는 학교 부근 친구 집을 모두 방문하고, 30분 이상 걸어서 가야 하는 친구 집까지 갔습니다. 버스와 차는 이용하지 않고 도보만을 이용해 다녔습니다. 우리는 무거워진 마대 포대를 이따금씩 나눠 들며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유독 떡을 좋아했던 저는 떡을 먹을 생각에 설렜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모르겠네요.        


해가 저물 때쯤, 학교  방앗간에 도착한 저희는 다음  아침에 찾으러 오겠다며 백설기를 주문했습니다. 30  친구들을 생각해 넉넉하게 40인분으로 요청했죠. 쌀을 거두러 다니면서 저희는 회비로 1000원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떡값과 음료수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그해 여름 방학식 , 떡과 과자, 음료를  친구들과 먹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던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네요.  이후 매번 방학식 전날이면 저는 친구들과 함께 쌀을 거두러 다녔습니다. 방학을 하는 것보다 책거리를 하는 것이  설렜습니다.  번도 가보지 못했던 친구 집을 가는 것은  하나의 재미였습니다.     

 

사진. 플리커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즐거운 책거리가 밋밋한 날이 됐습니다. 누군가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책거리에 대한 기막힌(?) 아이디어를 낸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나 학부모 중 한 분이었는지 모릅니다. 일일이 친구 집에 가서 쌀을 거둘 필요 없이 방학식 전날 친구들에게 쌀을 한 움큼씩 비닐봉지에 담아 오라고 하면 되지 않냐라는 것입니다. 그때 저희는 그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이후 친구 집집마다 걸어 다니며 ‘쌀 한 줌 줍시오’라고 외쳤던 추억의 쌀 원정대는 해산했습니다.      


그 시절, 해 질 녘 쌀이 담긴 마대 포대를 들고 붉게 물들여진 길을 걷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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