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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연 Mar 21. 2021

빛나는 것 뒤에는 필시 배경이 있다

by <이름없는 새>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빈둥빈둥 백수로 지내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토와코는 외모도 볼품없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무능력한 남자 진지에게 얹혀산다. 지난 사랑을 끌어안은 채 자신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없이 토와코를 사랑하는 진지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걸 알고 그녀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집착처럼 보이는 진지의 사랑, 그것을 버거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토와코. 하지만 결국 토와코는 진지의 진심을 알게 되는데... 대체 그 둘에게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목련에 이어 벚꽃에 개나리까지 피어 봄이 다 온 줄 알았더니 오늘은 기온이 훅 떨어져 패딩을 다시 꺼냈다. 밀당의 귀재인 봄답다. 겨울의 끝에서도 쉬이 마음을 내어주지 않지만, 이제 곧 여름과 또 한 번 실랑이를 펼칠 게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반팔과 트렌치코트 사이에서 “이놈의 날씨!”하고 한 바가지 욕을 퍼붓게 되겠지. 하지만 작년에 이어 이번 봄에도 나는 통 크게 마음을 쓸 것이다. 바이러스와 미세먼지를 피한 실내에서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는 일이야말로 내가 봄을 감상하고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테니까.


그렇게 하늘을 쳐다보던 어느 날 매일 구름만 그리며 산다는 어떤 화가가 떠올랐다. 구름처럼 변화무쌍한 자연이 없어서란다. 인간은 불변의 진리가 마치 인간을 구원해 줄 것처럼 열렬히 추구하고 살지만, 사실 불변의 가치는 변화라는 현상 없이 규정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불변의 진리일지도 모른다.

변화의 중심은 단연 자연인데 풍운조화(風雲造化), 사시산색(四時山色), 행운유수(行雲流水) 등 자연의 변화를 표현하는 말 중에는 유독 구름과 물, 바람이 많다. 당연히 이것들은 예술적 영감의 대상들이다. 나는 그림에는 문외한이나 얼핏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흐르는 물은 구름만큼이나 다양하게 화폭에 담아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순간 구름이 대단한 자연이구나, 하는 자각이 새삼스레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며 그간 무심한 눈길조차 주지 못한 구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하늘이 구름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거라고.”

언젠가 아는 지인에게 이 화가 얘기를 전했더니 그 지인이 대뜸 이렇게 말을 하기에 ‘아! 정말 그럴 지도 모르겠네.’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느 날은 하얗게, 어느 날은 검정을 머금은 잿빛에, 지는 태양빛에 따라서는 주황이었다가 빨강이었다가 뜨는 달빛 앞에서는 노랑이었다가 흑백의 그라데이션이었다가. 형태만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멋스럽게 변색도 할 줄 아는 구름이 없다면 광활하기만 할뿐 온통 파랗기만 한 하늘이 무에 그리 아름답게 보였겠는가. 가끔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에 마음이 동할 때도 있지만 매일 그런 하늘만 본다면 김빠진 맥주마냥 밍밍할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그렇게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다가 ‘아이고, 하늘이 오늘은 밍밍하네, 친한 친구가 놀러 안 와서 심심하겠네’, 하다 말고 ‘에잉? 가만, 뭔가 닮았는데?’ 싶은 것이다. 그래! 크로마키 스크린이랑 닮았네!
그랬다. 하늘은 그 위에 무엇을 입혀도 영상화할 수 있는 크로마키 스크린, 일명 마법의 스크린과 꼭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하늘이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서 진지가 참 지질해 보여서 싫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네,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그 배우까지 싫어질 것 같이 정말로 그 인물이 너무 꼴 보기가 싫었다. 객관적으로는 진지에게 토와코는 완벽한 민폐동거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사랑을 못 잊고 심지어 다른 남자랑 바람피우는 토와코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됐다. 법적 부부도 아니고 그저 동거하는 사이인데 헤어지면 될 걸 왜 저러고 사나 싶었고, 무슨 약점이 잡혀 있는 것이라면 사지 멀쩡한 몸으로 도망이라도 치지 참 너도 못났다 토와코, 했던 것이다. 인물이 미워 보이니 그 남자의 헌신도 별 볼일 없이 느껴졌다. 그저 환심을 사려는 수작이거나 행여 여자가 떠날까 두려워 집착하는 것이라고 쉽게 치부해 버렸다. 토와코가 바람피우는 것을 안 뒤 계속 그녀를 미행할 때는 분명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까지 생겼다.

그런데 토와코가 잊지 못하는 옛 남자친구가 오래 전 실종됐다는 일로 경찰이 수사 차 토와코를 찾아오고, 토와코의 상간남이 토와코를 이용만 하다 버리려 하자 진지는 더욱 철저히 토와코를 보호하기 시작한다. 기시감을 겪어오던 토와코가 마침내 과거의 진실을 기억해내고 진지가 왜 그토록 자신의 곁을 지키려 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상황은 급반전한다. 진지만이 해줄 수 있었던 진실한 사랑의 모습. 자신이 받아왔던 사랑의 크기가, 그 깊이가 세상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토와코. 그러나 언제나 진정한 깨달음은 큰 상실을 맞이한 직후에 찾아오는 법이다. 진지를 잃은 세상에서 토와코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 볼수록 현실과 가상이 완벽히 분리되지 않는 때가 점점 많아진다. 수술을 많이 해 본 의사들이 인체를 마네킹처럼 느끼게 되는 것과 반대로 나는 영화를 많이 접하게 될수록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쉽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 힘들다.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며칠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타인의 삶>이 그랬고 <천 번의 굿나잇>이 그랬으며, <진링의 13소녀>가 또한 그랬고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또 그랬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보고 난 뒤의 먹먹함으로 새벽 4시까지 엉엉 울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진지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떻게 하면 그에게 사과할 수 있을지 묻고 또 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을 미워할 수가 있었지 나는? 오해도, 불쾌감도 아니고 완벽한 미움이었다는 것이 그토록 사무치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마침내 크로마키 스크린과 하늘이 닮았다는 생뚱맞은 생각이 스쳤을 때 하늘에게 가졌던 그 느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하늘에게 정말 사과하고 싶었다.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한 대상에게 완벽히 배경이 되어주는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일방적 포용을 허락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늘은 구름에게 빚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구름이 제멋대로 찬란하게 변신할 수 있도록 기꺼이 하늘은 자신을 배경으로 내어 주었다. 저 홀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저 홀로 화려한 것은 감동이 없다. 구름이 매순간 자신을 카멜레온처럼 변신시키며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던 건 하늘이 크로마키 스크린을 자처해 준 덕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들의 조화 속에서만 발현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구름과 하늘의 관계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인 구름과 천고불역(千古不易)인 하늘의 완벽한 앙상블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하늘과 구름의 관계가 인간관계에서는 온전히 성립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말로는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하는 자식에게도 어느 순간엔 베풀어준 만큼 갚는 게 효도라고 가르치는 게 현실일진대 대체 어떤 상대에게 온통 배경이 되어주고 그림자라서 행복한 사람이 있겠냐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쉽게 단정할 수는 없겠다. 아무리 영화 속 현실이라고 해도 진지를 본 사람은 이 문제의 답을 쉽게 결론내리지 못할 것이기에. 그래서도 안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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