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각 한가득
점심시간에 가끔 라디오를 듣는다.
"내 삶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면, 어느 감독에게 의뢰하고 싶은가요? 사연 보내주세요." 대충 그랬던 것 같다.
DJ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에게 맡기고 싶다고. (여기까지만 들었다.)
'내 인생의 주연/감독은 나 자신인데, 누구에게 맡길 수 없지.' 하다가...
'아니지, 영화라면 다르지. 훌륭한 감독이 많으니, 누가 좋을까' 질문에 걸려들고 말았다.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아무래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멋진 감동의 스토리가 탄생할 것 같다. 그리고 변영주 감독과 임순례 감독도...좋지만, <화차>는 비극적이고 <리틀 포레스트>는 아름답지만, 일을 너무 많이 해야 하니까 no.
좋아하는 감독이라도, 내 삶을 맡기려니 고민된다. 어디 보자.
일단 호러나 에로는 안돼. 어차피 죽을 텐데,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범에게 칼자루를 쥐게 할 순 없지.
자르고 부러뜨리고 유혈 낭자한 슬래셔 무비는 사양한다. 에로틱한 영화에도 관심 없다. 현실과 매우 다름!
재밌게 본 영화들을 떠올리니, 가장 먼저
<본 시리즈> 중,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생각난다. '앗, 그건 관객일 때나 재미있지, 실제로는...'
스파이 훈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알 텐데? 국가를 위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희생양이 되면, 너무 씁쓸할 듯. 쓰고 버려지는 인생이면 더욱 사절이요. 까딱 잘못되어 감금되고 구타당하거나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고. 계속 쫓기거나, 인간병기가 된 후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린 체 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으니, 사양!
난 제이슨 본처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펜과 신문지만으로도 대적할 능력이 없으므로 꿈깨.
이야기꾼, 타란티노라면 내 얘기도 재밌지 않을까?
아니다. 허를 찌르는 재미, 반전의 대가라지만, 이 또한 목숨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듯.
<헤이트 풀 8>처럼 산장에 갇힌 채, 서로 속고 속이다 결국 허무하게 가는 인생이라니...
스필버그라면 뭘 해도 성공작일 텐데...? <우주전쟁>이 있구나.
그리고 외계 생명체와 교류할 정도로 외롭지 않아. <ET>를 만나면 기절할지도 모르고. 혼자서도 잘 노는 데 굳이 저 먼 곳까지 손을 뻗어야 하나...
히어로물, 마블 시리즈의 감독이라면 신나는 인생을 만들어 줄 것도 같은 데...
동네 영웅이란 사실을 숨기며 사는 인생이 짜릿할 것 같냐.
10대의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짠했다. 친구들과 한참 놀아야 할 나이에, 지구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다니...
그럼 이 분은 어때. 서민의 애환을 잘 알고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깨어있는 지성, 심장이 따뜻할 것 같은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런데 이미 사회적 약자인데, 굳이... 영화에서마저... 눈물 날 것 같다.
또 누가 있을까. 컬트 무비는 보는 걸로 만족이고,
로맨틱 코미디는 대부분 해피엔딩이라 안심이지만, 난 에피소드가 없어. 칙릿 무비에 흥미를 가질 나이도 지났고. <쇼퍼홀릭>은 좀 재밌겠지만.
타임 리프는..? <백 투 더 퓨처>하려니, 불안하다. 과거를 바꾸면, 현재도 바뀌고. 완벽을 추구할 순 없어. 게다가 자꾸 과거지향적 삶을 살면 발전이 없지.
그럼 좀 신나는 액션은 어떨까. 치고받는 건 싫지만,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좋아하잖아. 울퉁불퉁 근육엔 관심 없지만, 멋진 차를 타고 신나게 달릴 수 있으니... <포드& 페라리>도 그래서 봤으니...
봉준호 감독은 칸에 다녀왔으니 믿고 맡겨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기생충>(영화 말고 진짜 기생충)을 싫어해. 모기도... 남의 피를 빠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해.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만, 감독님 영화의 주인공들은 절대 평범하지 않지... 무시무시해.
재미는 있지만 결말이 또 예사롭지 않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에게 맡겼다간, 나는 다른 생물로 바뀔지도 몰라.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새로 태어나라!" 라며, 바닷가재나 뭐 다 시들어빠진 채소 등등
코엔 형제는 두 명이니까 좀 낫지 않을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그날 밤, 꿈속에서 내 방 문고리를 붙잡고 땀 흘렸던 것 기억나지? 절대 안 돼.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내 울퉁불퉁한 인생길도 아스팔트처럼 매끈하게 만들어줄 것 같다.
'터널 끝에 보이는 한줄기 빛'을 보여줄 것 같은 예감?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잘 이해하고, 보듬어줄 것 같아서.
아, 지금 당장 <라스트 미션>에 나온 링컨을 타고 해안가 도로를 드라이브하고 싶구나!
앗,제발... <아메리칸 사이코>는 만나지 말길~!
오늘의 몽상, 공상, 백일몽은 여기까지.
이해하기 힘든 세상, 가끔은 판타지가 나를 견디게 한다.
혼자놀이의 달인, 영화 주인공이 아니면 어때.
내 인생은 내가 써야지.
11월 18일 <mank>가 개봉했다.
데이비드 핀처와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만남이라... 보고 싶다.
이 또한 (못 보고) 지나가겠지...
12월엔 <조제>가 개봉한다.
한지민, 남주혁 주연
보아하니, 배경도 작품 같다.
왜 영화관엘 가지 못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