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차창 틈으로 스며든 가을 햇살 덕분일까. 어제의 피로는 오늘의 환희로 바뀌었다. 도서관 근처 가로수길에 접어들 무렵, 엘리제를 위하여가 흘러나왔고, 순간 버스는 나를 위한 작은 콘서트홀이 되었다.
첫 선율 몇 마디만 들었는데, 눈앞이 잠시 흐려져 나뭇잎과 햇살이 번져 보였지만, 다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엘리제를 위하여는, 일부러 찾아 듣지 않는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주 들었고, 횟수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 들은 엘리제를 위하여는 평소와 달리 음표 하나하나가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아마 지난여름 계촌 음악회의 피날레를 장식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라, 그때의 상황이 떠올라 감동이 더해진 듯하다.
2025년 1월 17일, 소위 말하는 피 튀기는 경쟁을 뚫고, 겨우 하나였지만, 예매에 성공했다. 공연일자는 9월 19일 금요일 오후. 하지만 공연 이틀 전, 결국 표를 취소하고 말았다. 9개월을 기다렸던 내 시간과 계획을, 1초 만에 날려 보냈다. 실수도 아닌, 내 의지로.
이유는 간단하다. 공연시간은 1시간 30분. 하지만 왕복 시간까지 더해지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리니, 앉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예매 당시에 이런 사태가 빚어질 거란 상상은 전혀 하지 못했고, 가을 무렵에는 괜찮을 줄 알았다. 수수료 20%를 내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음 한편이 살짝 무거웠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기차표, 비행기표, 공연예매 취소, 강연, 행사신청 취소... 페널티 무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수수료 인생.
갑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잃어버린 기회가 제법 많았다. 잃어버린 돈보다 아까운 것은 바로 시간이다. 더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일은 없었다. 내 시간과 비용을 잃었을 뿐이다. 생각을 달리해 본다.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닌 가진 것, 현재의 것에.
"지금" 몸이 불편하지만, 일상이 끝난 것도 아니고,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하고 싶은 일에 예전보다 더 집중적으로 몰입하며 살고 있으니, 시간을 다른 곳에서 벌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감한 게 어딘가.
그럼에도 당시엔 아쉬움이 남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자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고, 정확히 3일 뒤, 화요일 오전, 내 이름이 호명되고 신청곡이 흘러나왔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게 되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마음 편히 들을 수 있는 작은 무대가 있음을 다시 깨달았다. 밥을 먹으면서 들을 수도 있고, 길을 걸으면서 들을 수도 있다. 누워서 뒹굴뒹굴하면서 들어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내가 속한 공간은 모두 나만의 콘서트장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베로나 야외극장에 찾아가지 않아도, 멋지게 차려입지 않아도 음악을 즐길 수 있음이다.
잠시 통증에 함몰되어 버렸는데,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에 몰입하며 마음을 달래게 되었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공연은 또 열리게 마련이다. 붙잡지 못한 건 이미 내 것이 아니므로 생각을 두지 말자. 다행히 2025년 상반기에 다녀온 클래식 축제에서 영혼이 정화되었던 경험을 했으니, 추억만큼은 붙잡아 둘 수 있다. 게다가 "이제" 가을에 접어들었다.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그런 말 믿지 않는다. 뭐든 다음 기회는 주어진다. 그땐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원하는 장소에 당도해 있으리라.
부탁한다. 허리야, 제발 얼른 나으렴. 허리 업! (Hurry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