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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냥이 Oct 12. 2019

[이야기]당신과 내 인생의 이야기

끝을 알면 달라질까


생각한다 당신과 내 인생의 이야기

우리가 삶의 끝, 생명의 끝을 향해 가는 것을 자명하다.

그건 태어나는 순간부터이다. 삶이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게 다가오는 순간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다. 키가 크고 지식이 성장할 때,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저 사실을 말하자면, 태어나는 순간 이미 끝은 정해져 있다. 이 정확한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하면 부정 탈 것처럼 대한다. 내가 그렇다. 말을 조심스럽게 하기로는, 나는 참 세상 조심스럽게 산다. 그러니 이런 순간에 한 번씩 얘기한다. 특별한 감정이나 어조를 실지 않고, 마음에 별 동요도 없이 담담히 말한다. 어쩔 때는 모두가 그래서 다행이지 싶다. 세상 모든 생명체는 다 태어나서 세상에 나오는 순간 끝을 향해 간다. 처음과 끝은 달라지지 않고 달라질 수 없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하루 하루의 깊이와 온도가 다를 뿐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책의 선택은 본능일까.

나는 오늘 왜 이 이야기를 골랐을까, 어떻게 이 이야기를 고르게 되었을까.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읽었어도 오늘의 내 마음을 쓰게 할 문장, 생각, 감정을 만났을까.


테드 창 소설, 김상훈 옮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엘리, 2016.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이중 한 단편이며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는 예전에도 읽었다. 그때도 참 열심히 읽었다.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문장을 건너뛰지도 않고 곱씹어 보며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 문장을 다 이해하고, 문장 속에 설명된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면 내게 지혜라도 생길 것처럼, 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합하여 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생길 듯이 공들여 읽었다. 그렇지만 과학 지식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나는 헵타포드 언어처럼 과거부터 미래까지 동시에 인지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순차적, 인과적 관계에서만 현상을 이해하고 추론할 수 있다. 나의 연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책을 읽고 가만히 "우리가 만났다"를 조용히 되뇌인 적 있다. 그러면 우리의 선형적 시간이 한 번에 아우러지며 미래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모자를 쓰고 푸른빛 체크무늬 코트를 입은 그와 내가 무언가를 함께 보며 이야기하는 장면만이 떠올랐다.


그는 어땠을까. 그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알고 있었을까. 우리의 첫 데이트에서 그는 알았을까. 우리가 이 시간을 함께하고 서로 아픈 속내를 나누게 될 것을. 지금까지 우리는 이렇게 지냈다. 이 이상의 미래는 나도 알지 못한다. 몇 가지 제약이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우리는 굳이 그 제약을 깨거나 대항하려 하지 않는다. 여러 부분에 대항해야 하기에 이럴 수도 있다. 어떤 제약은 너무 크다. 대항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그 과정이 오히려 우리를 소모시키고 말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거치며 우리가 사랑을 지키고 돈독해진다기보다매우 지치고 슬퍼져, 전쟁에 아니 나섬보다 못해짐을 짐작하기에 이럴 수도 있다. 이대로가 더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삶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기에 몰두하지 말고 하루하루의 기쁨, 사랑에 충실한 편을 택함이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끝을 알면 달라질까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루이즈의 질문을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루이즈는 헵타포드 언어를 배우며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인지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아이에 대해서도 그랬다. 게리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라고 물을 때, 루이즈는 이미 이 아이의 처음과 끝을 다 알고 있었다. 그 끝이 해피엔딩이 아님을 알았다. 그럼에도 루이즈는 멈추지 않았다. 환희의 극치를 위해서일까, 그럴지도 모르나 아닐지도 모르는 고통을 굳이 확인하기 위해서일까, 헵타포드의 언어 체계 안에서 생각과 세계의 차이를 경험하려는 모험심 때문일까. 루이즈는 스스로 하는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을까. 최소한 자신의 마음이 어느 부분이 더 치우쳐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나는 루이즈의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답을 해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질문이 내게 돌아오자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어떤 슬픔이 내게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의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헤어지는 법을 몰라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슬픔을 견딜 만한 강한 인간이라는 착각인지도 모른다. 슬픔이 내게는 인생의 과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청승이 아직도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슬픔이 닥쳤을 때, 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저주스러웠는지를 깨달았으면서도, 나는 다가올 슬픔에 대비하여 이 사람과 지금 헤어지느니 내가 당신을 감내하겠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쓰다 보니 나도 그렇다. 큰 틀을 안다고 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런 큰 틀이 앞에 있을지 모른다고 해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하지 못함에, 해맑게 꿈꾸지 못함에, 나는 이 문장을 쓰면서도 울먹임이 올라온다. 그는 어떠할까. 나는 그의 괴로움을 다 알지도 솔직히 말하면 다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거기에 대해 큰 부담은 없다. 우리의 역할이 꼭 서로의 아픔을 다 이해해야 됨이 아님을 다. '이해'라는 말도 거추장스럽다. 수용할 수 있는 정도라면, 이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 이해라는 말을 써야 하는 때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무언가를 마주쳤을 때이다. 굳이 거기까지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가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만큼에 충만함을  느끼고 곁에 머무른다.


어떻게 그러냐고 한다면, 내가 「네 인생의 이야기」 다음으로 읽은 책이 도움을 줄 것 같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며 석양 무렵의 가문비나무숲을 걷는다. 축축한 대기가 느슨하고 따뜻하다. 숲속 카펫에 떨어지는 무스(사슴과의 포유류) 똥에 물기가 조금 배어 있다. 버드나무의 새싹이 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붉은다람쥐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숲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작은 장작불이 흔들리고 있다. 타닥타닥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의 마음을 풀어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어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역시 묘한 거야. 사람의 마음이란. 아주 자잘한 일상에 좌우되면서도 새 등산화나 봄기운에 이렇게 풍족해질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호시노 미치오 글,  이규원 옮김,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104쪽, 청어람미디어, 2005



삶의 무게는 깊고 원초적이다. 처음과 끝은 달라지지 않고 달라질 수 없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하루 하루의 깊이와 온도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 그 사이의 작은 달콤함과 따뜻함을 더 주고 싶고 더 깊게 누리고 싶다. 그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이들 모두에게.

가을 국화. 조계사 국화축제. 빛이 밝아서 오히려 어두워보이는 사진. 꽃도 보고 국화빵도 먹고 같이 걷고 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가끔 심각해지면 심각해졌다가 얼마 뒤면 또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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