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한다. 빵집에서 일하고 있다. 빵집으로서는 이곳이 두 번째이다. 첫 빵집은 작았다. 나름의 우아함을 유지하는 곳이었다. 동네빵집이고 손님들이 거의 동네 주민들이어서 빵 설명을 하고 단골을 확보하기에 좋았다. 상냥하게 하면 그대로 피드백이 오니 아무리 손님-점원 사이를 유지한다고 해도 천천히 신뢰를 쌓고 친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일터였다. 작아서 장점이었고 작아서 단점이었다. 2년을 하자 판매와 매장 관리 일에서 조금은 변주를 하고 싶었지만, 딱히 나아갈 포지션이 없었다. 회의에서 내 답답함을 비쳤으나 변화는 없었다. 갑갑함이 쌓이고 쌓였다. 회사 확장 건으로 오해 또는 불통이 이어진 뒤, 작고 예쁜 빵집을 그만두었다. 더 큰 곳에 가면 그런 갑갑함이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빵집은 지금 일하는 곳이다. 내가 원한 대로 크고,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이고, 내가 좋아하는 동네이다. 매니저나 팀장이라는 직급 없이 다시 사원이 되었지만 그렇게 시작해도 괜찮았다. 그동안 일하던 바탕에 이곳 일을 착실히 익혀서 승진도 하고 싶었다. 내가 일하던 대로만 해도 지난 직장보다 더 많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크고 더 여러 사람이 있고 승진체계가 있으니.
지금 상황은 이렇다. 5월 초에 입사해서 5월 말이 시작될 무렵, 그만두자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일을 시작한 지 오래 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처음보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몸으로 힘든 건 지난 직장보다 덜했다. 매장도 더 크고 휴식시간 외에는 앉아 있을 수도 없는 곳이건만, 여러 사람이 나눠서 해서인지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대신 조목조목 할 일도 훨씬 많고 기억할 것도 많다. 웬만한 일은 적어도 두 번은 확인하고 하고 있는데, 한 번에 그 많은 디테일을 다 숙지해서 못해서이고, 지적당하기 싫어서였다. 일을 배우며 이 일터에 적응하고 자유로워진다기보다 일 배우는 과정부터 꼬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나가면 다음 사람이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구조도 아닌데, 왜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하게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자 5월의 늦은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자 그만두자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일하는 사람들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림책은 진작에 원했다. 그런데 어렴풋한 이미지, 책 속 장면 하나씩은 생각이 나도 확 끌어당기는 책은 생각나지 않았다. 『리디아의 정원』이나 『바구니 달』도 일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밥벌이의 지겨움, 많은 시간을 공들이고 고민하게 하는 직업을 이야기하기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말하려 하는『바닷가 탄광 마을』이 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산 책은 아니었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안정적인 그림책이어서 골랐는데, 읽을수록 두 작가에게 쌓여 있는 이야기의 힘과 그것을 풀어내는 힘에 빨려들어간다.
『바닷가 탄광 마을』은 내가 산 책 중에서 최신간으로 분류할 만한 책이다. 나는 자꾸 10년도 더 전에 출간된 책들을 사 모으고, 번역 그림책은 원 출간연도가 1950년대~1990년대인 책들에 눈이 간다. 그러니 2017년 12월에 나온 『바닷가 탄광 마을』은 최신작에 속한다. 수묵화처럼 선이 살아 있는 드로잉과 은은한 색채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되 메시지를 짐작하게 하거나 메시지의 충격을 은은히 전하는 그림책을 만났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 실험과 시도로 한 장 한 장을 이어가는 책들 속에서 이런 그림책은 고전적 문법을 따르는 그림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그림책들이 나를 끌어당긴다. 『바닷가 탄광 마을』은 처음에는 큰 힘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드로잉 실력, 담백한 글의 묘미, 글과 그림의 어울림이 안정적이고, 이런 점이 내가 곧잘 사들이는 고전 그림책의 연장선으로 보였다.
이 그림책은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케이프브렌턴 섬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다.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여 광부 가족의 하루를 그렸다. 글 작가인 조앤 슈워츠는 이 섬에서 태어났다.
제목 그대로 바다 옆 탄광 마을의 이야기이다. 그곳에 사는 소년이 자신의 하루를 이야기한다. 소년이 일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일터로 향한다. 소년은 바닷가 마을에서 나는 소리에 서서히 잠을 깨어난다. 일어나서는 옷도 다 입지 않은 채로 창가에 기대어 어두운 일터로 향할 아버지를 생각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광부이다. 어두운 갱도를 내려가 일을 한다. 그림책은 지상에서 소년의 일상과 일상 곳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 소년의 시선이 가 닿는 바다 저 아래 깊은 곳의 갱도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소년이 있는 지상의 세계는 환하고 살랑거리고 반짝이다. 소년의 아버지가 있는 갱도에는 빛이나 바람이 없다. 무게와 어둠이 가득차 있다.
광부 아버지는 소년이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서 탄광으로 내려가고
소년은 일어나자마자 바다를 응시한다. 소년이 응시하는 바다, 그 아래 깊은 곳에 있는 탄광에서 소년의 아버지가 일한다.
바다의 드넓은 풍경은 누군가에게는 낭만의 대상이자 일상의 갑갑함을 풀어준다. 소년은 바다를 보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고 있을 아빠가 생각난다. 아빠가 일하는 곳은 깊고 어둡다. 새까만 물리적 어둠과 물리적 무게로 완벽히 둘러싸인 곳이다. 그곳은 위험하기도 하다. 갱도를 파고 또 파다가 잘못해서 그들을 둘러싼 어둠과 무게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생기면 광부들은 재빨리 그곳을 피해야 한다. 탄광일은 생계수단이고 그들의 매일을 책임져주지만, 목숨을 담보로 할 정도로 위험하고, 지상의 가족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일이다.
바닷가 탄광마을은 겉에서만 보면 평화롭고 아름답다. 바다의 물비늘, 살랑이는 바람, 산뜻한 하늘. 광부 아버지는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온 가족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노을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이 단란한 풍경과 시간의 밑받침에는 어두운 탄광이 있고 그곳에서 일하는 많은 광부가 있다. 목숨을 담보로 일한다고 해도 질 좋은 비싼 소시지 대신 볼로냐소시지를 먹고, 평화로운 마을에 사랑으로 가득한 가족의 모습이지만 아이는 광부 이외의 미래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다 그러했으니.
글 작가인 조앤 슈워츠는 캐나다의 케이프브렌턴 섬에서 태어났다. 케이프브렌턴 섬은 이 그림책 속 바닷가 탄광마을의 배경인 곳이며 조앤은 이 곳에서 자랐다. 이 이야기가 자신에게는 현실이며 광업과 이 직업의 되물림은 이 지역에 깊게 뿌리 내린 삶의 배경임을 말한다. 탄광마을의 이야기는 그녀를 계속 붙잡고 있었고 결국은 그녀가 한 편의 이야기로 내놓게 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역사는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광산 노동자의 투쟁과 이 투쟁으로 인한 가난과 고난 등 이들의 삶을 얼마나 더 역경으로 몰고 갔는가 하는 것까지 글 작가의 망에는 포착되고 그녀를 둘러싼 삶으로 인식되고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짐작하고, 그녀의 인터뷰를 빌어 조금 더 친밀히 짐작할 뿐이다.
'일 and 삶'일까, '일 vs 삶'일까
가족들과 단란한 저녁을 보내고 소년은 잠자리에 든다. 바닷가 탄광마을에 까만 밤이 내렸다. 성실하게 하루를 마친 자가 누릴 수 있는 평화로운 밤이다. 소년이 하루를 마치며 우리에게 말을 남긴다.
"화창한 여름날을 생각해요.
그리고 컴컴한 땅굴을 생각해요.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거예요."
마지막 두어 펼침면, 소년의 말을 천천히 읽어내리다 보면, 그 뒤로 깔린 어둠에서 밤의 포근함 대신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자신도 탄광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 이 마을에서는 다 그런다고. 바닷물이 햇빛에 반짝이던 모습을 보던 소년이 몇 년이 더 지나면 바다 밑 검은 세계로 향하게 될 것이다.
소년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생활에서는 바닷가 탄광마을의 풍광과 광부 가족의 하루를, 소년이 잠자리를 들어 잠이 들며 남기는 말에서는 대대로 이어온 광부 가족과 이 지역의 문화를 짐작하게 한다. 소년의 세계에서 어른이란 광부로 정해져 있다. 그곳에서의 삶은 그렇다. 그런 삶을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그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른 삶과 다른 직업에 대해 우리는 수면 위의 모습만 볼 수 있다. 좋은 모습이든, 나쁜 모습이든, 자신의 선입견과 수면 위에 언뜻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한다. 다른 꿈을 꾸거나 선택할 기회를 누리지 못하고 세대에서 세대로 직업과 삶의 형태가 되물림 되는 형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으나 그 또한 외부의 시선이고 나 또한 학습하고 다른 이의 영향을 받으며 생겨난 판단이다. 직업이든 현상이든 보이는 단면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복합적 면모를 나는 다 짐작하지 못한다. 농부, 군인이나 선생이란 직업을 되물림하는 가족들이 있으나 이들에게 부당하다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탄광의 노동이 고되고 위험하므로 되물림이 부당하다고 할지도 모르나 종사자에게는 밥벌이의 수단이고 스스로에게 존재감과 가치를 주는 일이다. 경험하지 않은 자가 함부로 판단할 수 있을까?
다만 이렇게는 할 수 있다. 책의 앞쪽, 판권란에 있는 감사의 말에서, 글 작가 조앤 슈워츠는 아버지인 어빙 슈워츠의 말을 적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광부들에게 많은 짐을 지고 있다고 말하셨다." 광업은 어려운 일이며 그들의 노동으로 이 직업이 아닌 다른 이들은 광물 채취의 노고와 극한 위험 없이 광물의 이점을 누렸다. 물론 광부는 자신의 노동에 따른 고정적 보수를 받고 정기적 직업이 주는 안정성을 누리지만, 그럼에도 조앤의 아버지가 광부에게 돌리는 공에 나는 수긍한다.
『바닷가 탄광 마을』은 소개하고 싶은 책 목록에 있었지만, 내 주제 중 어느 주제에 더 맞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리스트에는 넣지 못하고 있던 책이다. 바다 물결에 햇빛이 반짝이는 풍경이 좋아서, 빛을 잘 그린 그림책으로 모아 넣고도 싶었다. 그러다 지난 휴일에 이 책을 펼쳤을 때, 탄광의 검은 풍경과 눈이 마주치자 마음에서 아, 하고 탄식이 올라왔다. 새까맣고 묵직한 탄광, 그 아랫부분에는 더 깊이 굴을 파고드는 광부가 있다. 그 풍경은 광부라는 직업을 가진 타인의 일이라기보다 보편적으로 느끼는 삶의 무게에 대한 은유로 읽혔다. 소년이 자신도 언젠가는 탄광에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고 말했듯,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다고 하듯, 일하는 사람이라면 마주하게 되는 막막하고 무거운 기분. 동료 때문이든, 전망 때문이든, 연봉 때문이든, 자신의 다른 생활과 부딪혀서이든 이유는 다르더라도 암담하고 무거운 마음은 어느 날엔가는 오고 만다. 내게 닥친 상황을 내치지도, 쉽게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채로 괴로워하다 받아들이거나 스스로의 도피 방법을 만든다.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 아버지들. 아버지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어둠이 무겁다. 때로 이 어둠이 쏟아져내려 광부들인 황급히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일터는 반복적이다. 반복적이라는 말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그만큼의 안정성과 반복하며 숙련되는 기쁨을 준다. 낯설던 장소가 익숙해지고 어려웠던 일이 편안해지는 때가 온다. 물론 아니 그런 날도 있다. 어두운 탄광의 색이 내 마음에 스미는 때도 오고 만다. 어두운 마음, 일터에 가기도 전에, 하루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를 내리짓누르는 무게. 내게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날이 살면서 한 번이, 하루가 아니었을 것이다. 새삼 느꼈을 뿐.
회사를 옮기자 출퇴근 시간은 더 길어지고 식구들과 함께할 시간은 적어지고 친구와의 시간도 그랬다. 예상하고 간 일이지만 내 사람들과 더 같이 하지 못해서 느끼는 결핍감은 실제로는 더 컸다. 회사 일은 익숙하지 않고, 상사는 내게 상냥하지 않고, 많은 동료가 있지만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존재감은 지난 회사보다 훨씬 미약해졌다. 잘 하려 하지만 지적당하는 일이 많았다. 친구가 오겠다는데 다 같은 근무복에, 혼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흔쾌히 답하지 못했다. 지난 회사를 떠난 데에는 후회가 없지만 그렇다고 이 생활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
일의 의미
그럼에도 일을 한다. 얼마 못 가서 이 일을 그만둘 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다른 일,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일. 나의 생계 수단이자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방법이며 나라는 노동으로 개인이 세상을 지탱하는 방식이며 또한 공을 들이는 놀이이다. 이 놀이가 없었다면 인간이란 종은 권태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놀이 때문에 인간이 얼마나 힘든지도 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제대로 된 룰과 동료와의 유대감이 필요하다. 사람을 살리는 노동을.
사실 일에 대해 쓰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그림책을 매개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내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르다. 일터에서는 생활비를 벌고 일터를 떠나는 순간, 내 개인 프로젝트인 글쓰기를 하자는 생각이 강해졌다. 깔끔하고 좋은 방법 같지만 그렇게 멋진 줄은 모르겠다. 나는 일과 일터 밖의 내 생활을 완벽히 분리한 적이 없다. 일은 내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이자 내 놀이였다. 그러므로 일터 밖에서도 나는 내 일을 공부했고 내 일을 고민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은 내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그럴 이유가 없으며 나는 주연급 일꾼이 아니라 회사를 돌아가게 하는 부속일지도 모른다. 이 분석이 그다지 서글프지는 않다. 오히려 글을 쓰고 내 프로젝트를 완료하기에는 더 좋은 방법도 같다.
다만 생각한다. 일하는 인간이라기보다 부속이 되는 인간으로 계속 지내게 될까? 내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회사 오너의 돈을 벌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는 했다. 이곳에서 나는, 일꾼으로서의 존재감을 부속으로 전락시키는 대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주인공으로 부상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부속품이었던 적이 없는 인간이 부속품이 되는 건, 그저 세상 이치를 인정하고 겸손해지는 것일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변화일까.
시간이 가기를 기다린다. 글을 쓰고 나를 돌아보며 알게 된 것은, 새로운 회사에서 한 달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내가 ‘일’에 대해 쓰고 싶은 주제는 당혹스러움이나 무게가 아니었다. 일이 주는 자유로움, 일의 아이러니, 인간에게, 인류에게 일의 역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쓸 수가 없다. 이곳에서 내 일이 아직 한 달치밖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 이전에 십 년을 넘게 일하며 일에 대해 두텁게 쌓인 생각은 잠시 놓아 둘 수밖에 없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도 나는 이 질문이 무의미했음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일은 가장 길게 즐길 수 있는 적합한 놀이이며 보수가 따르는 합리적 활동이라고 다시 말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학생일 때보다 직장인일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