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으로 시작해도 될까.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글을 쓴다. 첫 책으로 그림책 『내가 가장 슬플 때』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 정도로 절망을 직시하는 그림책은 찾기 힘들다. 내내 한 남자가 자신의 슬픔을 말한다. 슬픔을 벗어나려고 해 보았자 소용이 없기에 그의 슬픔은 절망감에 다름 아니다. 첫 장에서 그는 웃고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빨을 내보이며 웃는다.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모른다. 안 슬픈 척하는 거다.
다음 장부터 그는 바로 슬픔을 말한다. 에디가 세상을 떠났다. 자식 놈이 말이다. 아비인 그는 절망한다. 아들 에디가 아기 때부터 청소년 때까지의 모습이 한 컷 한 컷 이어지는데, 마지막 한 컷은 비어 있다. 어머니라도 같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그곳에 없단다. 이 아비에게는 다른 가족도 없는지, 누군가와 슬픔을 긴밀히 나누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슬픔은 힘이 세다. 아비는 그대로 슬픔에 뒤덮여 버린다. 어떤 때는 이유가 있어서 슬픈 건지 그냥 슬픈 건지도 모른다. 그도 애쓸 때가 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즐거운 일을 하고 슬픔은 모두에게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말한다. ‘슬픔은 어디에나 있다.’ ‘슬픔은 언제라도 온다.’ ‘슬픔은 모든 사람에게 오고 너에게도 온다.’ 안다, 다 안다, 슬픔이 뭔지 다 알아도 그는 공기 중에 사라지고 싶다 말한다.
생각과 시선은 어느덧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있는 추억으로, 결국 에디에게 도로 가닿는다. 에디에 대한 생각이 생일 잔치에 이르렀을 때 그는 말한다. “나는 생일을 정말 좋아해요.” 누구의 생일이라도. 생일 케이크에는 초가 가득 꽂혀 있어 방 안은 전등이 없어도 환하다. 마지막 펼침은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이다. 촛불 하나가 방을 밝히고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춘다. 그 빛이 따스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하다. 한 차례 격정이 지나간 뒤처럼.
그의 격한 슬픔은 촛불을 마주보며 순간 평온해졌지만, 그렇다고 촛불을 희망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는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고독, 외로움, 절망. 한 인간이 자신의 모진 감정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희망이란 단기처방제 같다. 희망이라 하는 순간, 지금 당장은 조금이라도 편해질지도 모른다. 잠시 밝아질지도 모른다. 첫 장면에 나오는 그의 얼굴처럼. 얼굴 근육에 미소를 띠우면 정말로 마음의 무게도 덜 나가고 마음의 주름도 펴지니까. 그러나 절망감은 다시 오고야 만다. 깊은 슬픔이란 그러하다. 그러니 슬픔을 애써 외면하거나 저버리려 해 보았자 나아질 게 없다. 자꾸 희망을 들먹거릴수록 희망은 절망에 비해 얄팍하고 변하기 쉽다는 속성만 드러난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정말 용감하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과 그로 인한 상처를 마주하는 순간을 맞닥뜨리겠지. 시간이 감을 묵묵히 견디고 깊은 감정은 그대로 받아들여 그 시간과 감정이 내 일부가 될 때 비로소 제대로 살아갈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다. 특히 후반부는 글 작가가 생각의 흐름을 따라 쓸 뿐 더 보태지 않은 듯하다. 함축적이거나 무뚝뚝하다. 말랑말랑하지도 않고 멋도 안 내고 최대한 절제하는데도 독자에게는 슬픔과 절망감이 진심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이 두 작가가 멜랑콜리 전문 작가도 아니다. 다른 작품을 보면 두 작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 준다. 지나치게 명랑하든가, 상쾌한 반전이 있다든가, 기상천외하든가, 뭐 그런 거 말이다.
우선 그림을 그린 퀜틴 블레이크는 영국의 그림책 작가로 아주 아주 유명하다. 활달하고 거침없는 선과 수채 물감 채색이 특징이고, 제멋대로라고 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느낌이 일품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지은 로알드 달과 많은 작품을 함께 했는데, 달의 엉뚱하고 발랄하다 못해 때로는 당황스러운 이야기와 블레이크의 유쾌한 그림은 아주 잘 어울린다. 퀜틴 블레이크의 그림은 재미있고 유쾌하다고만 생각하고 있다가 이 그림책을 보았을 때, 그의 자유분방한 선이 이런 침울하고 절망적인 느낌도 탁월하게 담아냈다는 데 놀랐다. 글과 그림이 제대로 어우러진 이 슬픈 그림책 자체에도 마음을 홀딱 빼앗겼지만, 퀜틴 블레이크의 연출력과 표현력에도 감탄했다. 같은 필치를 가지고 완전히 다른 주제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것도 글의 진심이 더욱 드러나게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글 작가 마이클 로젠. 그는 『곰 사냥을 떠나자』의 글 작가이기도 하다. 『곰 사냥을 떠나자』는 글의 운율이 뛰어나고 이야기도 재미있어, 우리나라 그림책 시장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책이다. 설마 이 두 그림책을 같은 작가가 썼을까 생각했을 정도로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내가 가장 슬플 때』는 작가의 실제 이야기이다. 1999년 4월에 그의 아들 에디가 세상을 떠났다. 에디는 18살이었다. 그 전날 저녁, 로젠이 집에 돌아왔을 때 에디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몸이 별로 안 좋아 보였지만 감기인 줄 알았고 농담도 했단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에디는 숨이 멎어 있었다. 수막염이었다. 그리고 오 년 뒤에 이 책이 나왔다. 에디가 세상을 떠난 몇 달 뒤부터 로젠은 다시 학교에 나갔고 아이들에게 아기 에디, 어린 에디가 나오는 시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물었다지. “에디는 지금 몇 살이에요?” 로젠은 에디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로젠은 이 책이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자 아기 에디, 어린 에디가 나오는 예전 책에 대한 답이 될 거라고 말한다.
나는 처음을 절망으로 시작해도 될까, 물으면서 답도 안 기다리고 글을 시작했다. 처음과 절망이라, 어그러진 조합 같지만 역설적으로 어울려 보였다. 절망감은 우리네 감정의 한 종류이고 기본이 되는 감정이다. 그 영역이 넓고 무겁고 깊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자꾸 두려워하며 멀리하려 한다. 한 번이라도 절망감을 직시하고 응시한 적 있을까. 애써 벗어나려 하면 늘 제자리로 돌아와 같은 정도의 절망감을 느끼기를 반복하게 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나마 평온해지는 순간이 온다. 오기로 버티는 인간됨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인간됨을 말하는 거다. 무거운 감정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는 거다. 처음과 절망과 바라봄은 희한하게 어울린다. 무거운 감정은 그대로 두고 자기를 직시하는 것이 자기 이야기를 알아 가는 시작점이 될 테니. 책과 예술 작품은 외부의 것이라도 느낌과 떨림은 내 마음이 한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서 내 이야기는 시작되고 덧붙여져 풍성해진다. 스스로를 타자화하지 않으면 된다. 떨림의 이유를 책 뒤표지에 있는 설명글과 맞추어 간다거나 남 이야기인양 마음 닫고 버티면 이 책 저 책 많이 보아도 느낌은 여전히 빈약하고 자기에 대한 관심의 폭은 넓어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치열함이 필요하고 그런 치열함이 드러난 책을 보여 주고 싶다. 그럼으로써 자기 삶에서 타자가 되지 않기를, 자기 감각으로 느끼기를, 자기 느낌이 살아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라는 거다.
『내가 가장 슬플 때』는 영국에서 2004년에 나왔고, 그해 11월 「가디언」지와 인터뷰할 때 마이클 로젠은 세 번째 부인과 함께였다. 그녀는 만삭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아이가 태어날 거고 그의 집 부엌에서 분만할 예정이란다. 그의 아들 에디가 세상을 떠났던 그 집이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희망이란 요란하고 반짝이는 구호를 두지 않아도 사람은 산다. 괜찮지 않은가. 삶이 무엇이니 저것이니 하는 정의와 개념 내리기 대신, 산다는 동사를 따르는 것 말이다. 그리고 변하게 되어 있다. 감정도, 그도 한 군데서 머무르지 않는다. 모든 상황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아니 그럴 것 같지만 그러하다. 로젠도, 그대도, 나도.
참고한 곳
http://www.guardian.co.uk/books/2004/nov/24/booksforchildrenandteenagers.dinarabinovitch
*이 글은 2013년 1월, 아티스트의 작품을 소개하는 진zine ERA에 실렸던 글입니다. 발행한 곳인 커넥션이드CONNECTIONiD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도 실었습니다. https://issuu.com/hayjinlee/docs/era 에서 전차책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