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의 문장들 2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문장을, 딸이 엮은 기록.

by 밍키

시골의 문장들_ 다시, 봄의 문장들 2


" 처음 만나는 거야? 나 알아?,

봄바람을 모르는 당신에게 "


북극의 얼음 공장들이 갑자기 기름 값이 치솟자

기름을 구할 수가 없어서 공장 문을 닫았는지

겨울삼동 살을 해이는 혹독한 추위를 몰고 와서

기승을 부리던 설한풍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싸들고는 꼬리를 말아 쥐더니

스멀스멀 북쪽 고향을 찾아서

삼십육계 줄 행랑을 놓자.


지난가을 노사 분규로 일시 폐업을 한

머나먼 남쪽 나라의 바람 공장이 노사 간 극적인 타협으로

봄바람이 아지랑이를 앞세워 몰고는 살랑살랑 꼬리 치면서

마을로 들어서다가 마을 입구 미루나무 꼭대기에 초소를 짓고는

마을을 지키는 까치 파수꾼과 맞닥 뜨으렷다.


까치는 지난밤 추워서 선잠을 잦는지

나뭇가지에 앉아서

깟딱깟딱거리고 졸다가

갑자기 초소가 마구 흔들리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앞에 서있는

낯선 봄바람을 발견하고는

"깍! 깍! 깍!"거리고 짖으면서

검문을 하려는 듯 앞 길을 가로막는다.


" 어디서 오시는 누구신지 잠깐 검문이 있겠습니다"

늠름한 파수꾼답게 검문을 하려 하자,

봄바람은 가소롭다는 듯 급 브레이크를 밟자.

또다시 미루나무는 부러지기라도 할 듯 휘청거리다가 겨우 바로 선다.


" 까치님! 저 모르시겠어요?"

봄바람은 애교라도 부리듯 생글거리고 웃으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는 체를 하자.


까치는 처음 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증명서를 내놓으라는 듯 눈알을 부라리면서

" 저는 처음 보는 분인데 저를 아세요?"

" 까치님! 나이도 어리신 분 같은데

침해끼가 있으신가 정말로 저를 모르시겠어요?"

봄바람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계면쩍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까치를 쳐다보자 까치는 여차 직하면

달려들어서 쪼기라도 할 듯 임전태세를 갖추자.


옆에 있던 미루나무가 잘못하면

한 판 싸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불쑥 앞으로 나서며


" 봄바람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미루나무가 반갑다는 듯 손을 내밀자

봄바람도 반가운 듯 덥석 손을 잡으면서

" 미루나무님께서도 겨울삼동 추위에

고생이 많으셨지요?"

둘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까치는

어안이 벙벙한 듯 화등잔처럼

눈 만 크게 치켜뜨고는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리자.


" 까치가 봄바람님을 몰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 저를 몰라보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지난해 늦은 봄에 태어 낳으니

봄바람님을 알 턱이 없지요 "

" 그랬군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새 대가리라서 나를 잊은 줄 알았지 뭡니까 "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봄바람은 말로써 멋지게 까치를 한 방 먹인다.


" 까치야! 인사드려라 봄바람님이시다.

해마다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우리 마을을 찾아오시는

아주 귀한 손님이시란다. "

새 대가리 소리를 들은 철없는 까치는

새 대가리 소리가 분 한 지

씩씩거리면서도 집주인인 미루나무가

인사를 하라고 하니 할 수 없다는 듯

대가리를 깝쭉거리면서


" 봄바람님! 귀한 손님을 몰라 보고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마지 못 해서 개 머루 먹듯 인사를 하자.


" 까치님!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잘 봐 두셨다가 내년에는 꼭 무사 통과 시켜 주세요"

예의가 바른 봄바람인지 어린 까치에게도

존댓 말을 쓰면서 깍듯이 인사를 하자.

그제야 까치도 잘못을 깨달았는지

“깍! 깍! 깍!"거리고 짖으면서 용서를 빈다.

"나는 갈 길이 바빠서 이만 갈 테니 까치님 수고하세요"

" 봄바람님! 그럼 살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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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글은 늘 자연을 '풍경'으로만 두지 않는다.
여기서는 봄바람이 '계절'이 아니라

한 사람처럼 들어오고,

까치는 그 손님을 모르는 철없는 신입처럼 등장한다.


순간 웃음이 나다가도, 그 웃음 끝에 묘하게 마음이 뜨끔해진다.

"처음 만나는 거야? 나 알아?"
이 한 문장이 사실은 우리 관계의 대부분을 건드린다.
오래된 것, 매년 돌아오는 것,

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어느 날은 '당연함' 속에서 잊히고,
새로 온 존재는 그 가치를 모른 채 경계부터 세운다.


나는 까치의 눈을 상상한다.

'꽃등잔처럼 멍한 눈.'
아버지는 까치를 미워하기보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말해준다.
"작년 늦봄에 태어났으니 봄바람을 알 리가 없다."
그 문장이 참 좋다.
세상에는, 나도 모르게 무례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 무례함은 악의라기보다

경험의 결핍에서 오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 글의 가장 따뜻한 장면은,

옆에 있던 미루나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는 순간이다.
봄바람에게 "잘 지냈냐"라고 묻고,
삼동의 추위를 견뎠냐고 안부를 건네는

그 장면이
마치 어른의 태도 같다.


누가 '처음'이라며 따져 묻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괜찮아, 이 친구는 귀한 손님이야"라고

소개해주는 사람이 된다.


나는 이 장면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내 삶에도 이런 미루나무가 필요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새로운 것에게는 '무례하지 않도록 맥락'을 주고,
오래된 것에게는 '잊히지 않도록 이름'을

다시 붙여주는 사람.

아버지의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봄은 매년 처음처럼 오지만,

처음이 아니라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처음 만났냐'가 아니라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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