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하듯 살다가
하루 종일 맑은 날씨가 예보되었다. 겨울 이불을 빨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전날 마신 소맥 때문인지 늦잠을 자고 말았다.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커튼을 젖혔더니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 성큼 방안으로 들어선다. 이불과 매트리스 커버까지 몽땅 들어다가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도 춥지 않은 실내 공기, 창밖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정문에 걸린 입학 축하 플래카드. 다시 봄이 왔다.
어제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 늦게까지 회포를 풀었다. 한 시절 같은 팀으로 일한 공통점 때문인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만큼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래, 너 일상을 쭉 한번 시간대별로 얘기해봐라.”라는 첫 물음에는
“휴일에 뭐 하세요? 그거 일주일 내내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돼요.”라고 가볍게,
“전번에 무슨 줌 수업 듣는다길래, 목표대로 잘살고 있겠거니 했어.”라는 말에는
“이제 목표 없어요. 하고 싶은 거 생기면 바로 하는 편이고.”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언뜻 자유롭게 들리는 내 답변에 “부럽다.”라고 술잔을 부딪쳐오면서도, 표정에는 여전히 궁금함이 묻어 있었다.
한편, 출퇴근으로 작동하는 세계는 한층 엄중해진 느낌이었다. 동료들의 나이대를 보면 마흔 후반에서 오십 대 초중반, 경력으로 보면 모두 20년을 넘긴 고참 직장인들이었다. 결재권자 의중을 파악하고 팀에 전달해서 성과로 이끌어야 하는 중간 관리자 역할에서 오는 피로함이 묻은 얼굴은 얼마 전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멀어져 있던 고단함을 한순간에 느끼면서도 모르는 일이 아니어서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근무 평가로 순서가 매겨지는 직장에서 ‘남이 둔 수’에 대한 토론(?)도 빠질 수 없었다. 이야기들이 왕성하게 오고 가는 동안 술은 재빨리 비워지고 웃음과 한숨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우리는 어쨌든 중년에 들어섰다. 고단함과 허무함이 생활 속에 버무려진 맛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은 나이가 된 것이다. 계절로 따져보면 가을에 접어든 시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각자의 가을을 맞이한 동료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로의 봄과 여름을 모르는 채 가을의 얼굴에만 익숙한 우리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지낼 때는 묻지 않았던, 궁금해하지 않았던 질문을 문득 해보고 싶었다. 어떤 열매를 가지고 싶었던 건지, 어떤 마음으로 다음 해를 보내고 싶은 것인지. 알고 있던 표정과 목소리가 다른 색깔로 바뀌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어느덧 삼겹살과 소맥이 바닥나고 인물평도 끝이 났다.
“다음에는 우리 집에서 한번 볼까요?” 하자
“언니, 나는 무조건 자고 간다!”라며 모임 내내 뜨거운 온도로 말하던 직원이 훅 들어온다.
다음 모임에서 우리는 서로의 지나온 계절에 대해 무사히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낯선 표정을 발견한 순간 용감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각자의 가을이 다른 모습임을 유쾌하게 인정할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나의 봄과 여름을 떠올려보았다. 그때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다정하게 대하는 법을 몰랐다. 성적, 합격, 승진 같은 성과에만 집중하다 보니 일상의 리듬 타는 법을,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감각을 자주 잊고 살았다. 나에게도, 그 계절 함께했던 사람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다. 쉼표를 찍고 있는 지금, 어쩌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능력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몸이 보낸 신호 같기도, 우주가 보낸 명령 같기도 하다.
올해는 무엇이든 새로운 것 한 가지를 해보는 것과 A4 다섯 장까지 쉽게 쓸 수 있는 힘을 길러 보는 건 어떨까? 건조가 끝난 이불을 꺼내며, 어제는 없다고 했던 목표라는 질문에 뒤늦은 대답을 해본다.
계절은 다시 봄.
주저함 없이 봄 이불을 꺼내듯 두려움 없이 여러 씨앗을 품어보고 싶다. 나의 가을과 겨울에 미안해하지 않으려면 낯선 문장과 새로운 질문을 부지런히 떠올리고 뿌려놓아야겠다. 다가오는 계절에는 더 귀여우면서 덜 진지한 표정이 되어 인사하고 싶다.
나의 계절과 자연의 계절이 사이좋게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