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숙제하듯 살다가

by 다시 봄

퇴직을 결심하고 나서 몇몇 사람에게 감사인사를 해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둔다는 이야기는 접어두고 별일 없는 것처럼 메신저로 안부를 물었다. 사무장 일 년 차인 나에게 좋은 시절이라며 즐기라는 말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동 주민센터에 속 끓이는 일이 이래저래 많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한다 싶어,

아니라며 한껏 진지모드로 대응하다가 슬쩍 옛이야기를 끄집어냈다.


H님께 : “그때 기억하세요? 소회의실을 행사 하루 전에 갑자기 리셉션실로 만들라고 해서 저 멘붕 왔던 거? 정신없는 저 대신 부서마다 돌며 소파랑 탁자 가져와서 뚝딱뚝딱 배치하고 회의실 입구 주변으로 장식 소품까지 전시해 주셨잖아요. 담당자인 제가 부담 느낄 새도 없이"

J님께 : “언니, 그때 내가 휴일에 갑자기 전화해서 나왔었잖아. 마음 안 맞는 직원 때문에 힘들다고 막 하소연하는 거 들어주고.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B님께 : “덕분에 다른 사람 위로하는 법을 조금 알게 되었어요. 힘내라고 직접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그 자리에선 잘 몰랐다가 집에 와서 다시 생각나는 말이 있더라고요.”


처음엔 다들 갑작스러운 추억 소환에 내가 그랬었나 하는 반응이었다가 잠시 그때로 돌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다. H님과는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때 도와주셨을 때, 감사하기도 했지만 놀라기도 했어요. 늘 제가 다 할 수 있고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많이 닫혀 있었어요.”

“너 좀 그래 보였어. 하하하.”

잘 숨기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마음만 보느라 같은 공간에서 나를 살피던 사람들을 몰라 본 것이다. 들켰었구나 하는 생각에 머쓱하면서 그것도 모르고 괜찮은 척 안간힘을 썼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도 났다.

“그런데 우리 팀 그때 분위기 참 좋았지. 너도 그렇게 느꼈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새삼스럽게 감사하다는 나의 인사에 화답이라도 하겠다는 듯 이모티콘 가득한 멘트로 마무리 인사를 나누었다.


그 시절 나는 내 편이라 생각한 사람에게는 뜨거운 감정 자체를 진심이라 착각하고 행동하다가 상대를 당황하게도 만들었고, 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쌀쌀맞게 굴며 곁을 내주지 않아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입을 다물고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되어 딱딱해진 마음으로 오래 머물러 있었다.


돌이켜보면 관계에서 쉽게 지친 것은 나와 타인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제와 오늘의 마음이 다를 수 있는 데도 상대에게 기계처럼 일정한 마음을 요구했고 내 마음 역시 의무적으로 할당하려 했다. 실망시키면 안 되는 역할로 살아오다 보니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아량이 없었다.


이제 쫓기는 속도로 살고 있지 않는데도 요 며칠 마음이 가라앉았다. 계속 소파에 누워만 있다가 분위기라도 바꿔보자 싶어 죄 없는 가구들을 또 옮겨보기로 했다. 옷방 한쪽을 카페 공간처럼 만들겠다고 안락의자와 화분을 가져다 놓으면서 그 자리에 있던 서랍장을 책방으로 옮기다가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다이어리 세 권을 발견했다. 서랍장을 밀어 넣고 방 한편에 앉아 쓱쓱 넘겨 보니 아름다운 문장 하나 없이 전부 자신을 들들 볶는 내용이다.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다짐이 여러 가지 말로 길게도 짧게도 쓰여 있었다. 같은 고민을 구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재미가 없다. 책이라면 덮어 버리고 영화라면 꺼버리기라도 할 테지만 나라는 인생은 덮지도 끄지도 못하니 지금은 먼지 앉은 바닥이나 닦을 수밖에.


안락의자 앞에 놓을 스툴을 검색하다가 문득 아까 읽은 다이어리 내용이 변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행복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내가 모자란 점이 많기 때문이라는 오랜 변명. 10년 전의 다짐이 다짐에만 그쳤다면 방법을 바꿔봐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단점이 없어야 온전하다는 생각을 비워 버려야겠다.

온전해 보이려고 무리한 시간이 너무 길었고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쉽게 들키지 않았던가. 부족하다고 해서 모자라게 보지 않고 '나'라서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공간으로 바라본다면 올해 다이어리에는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만큼 채워보는 것보다 ‘내가’ 채워본 만큼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면 조바심보다 호기심이 생길 것 같다. 누구와 비교하는 세계, 그래서 잘해야 한다는 세계에서 방향을 돌려야 할 때다. 이제는 무조건 사랑하는 세계로 들어서고 싶다.


카톡!

같이 근무했던 K의 이름이 뜬다.

“이번 인사발령,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언니 있었으면 같이 욕하면서 이야기했을 텐데.”


카톡!

내가 닫혀 있었다고 도장 꽝 찍어주셨던 H님.

"3월엔 한번 봐야지. 소주랑 맥주 다 되는 곳에서. 콜?”


여전히 같은 온도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나는 만날 것이다. 어느새 바닥을 닦을 때와는 다른 마음이 되어 답장을 한다.


“ㅋ ㅗ 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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