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하듯 살다가
한때 박찬호 팬이었다.
97년도 9월, 그해 마지막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고 하염없이 발령 전화만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나는 긴장이 풀려 방에서 책을 읽다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음 해 학원 강사로 일하러 나가기 전까지, 돌아보면 구직도 하지 않고 시험공부도 하지 않았던, 완벽한 백수로 지낸 기간이었다.
얼마나 좋아하면 팬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팬클럽에 가입한다거나 편지를 써 본 적은 없지만, 좋아한다는 전제를 ‘함께 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집중하는 것’에 둔다면 난 그 시절 박찬호의 확실한 팬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생 때, 해가 져서 어두워진 어느 하굣길에 변진섭 노래가 나오는 레코드점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끝까지 듣고 있던 이후로 누군가에 집중한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에서 선발투수로 활약하던 97년에서 2001년은 나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그에게 환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7년 한국은 IMF 외환 위기로 휘청거렸고 그때 해외에서 들려오는 젊은 야구선수의 승리 소식은 스포츠 신문 일 면을 덮었는데, 매일 그 신문을 사서 꼼꼼하게 다 읽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이었다. 야구 룰도 박찬호 경기를 보면서 알게 되었고, 선발로 등판하면 볼카운트를 적어가며 보기도 했다. 그의 책, 『나의 꿈 나의 도전』이라는 책도 사서 읽었고 다저스 홈페이지를 기웃거리기도 했으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자정 뉴스까지 빼놓지 않고 소식을 챙겨 보았다. 우리나라 선수가 빠른 볼로 덩치 큰 외국 선수들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하고 통쾌했다. 인터뷰에서 한국말을 영어처럼 굴려서 발음한다고 방송에서 지적당하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외국에서 잘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속으로 변호하기도 했다.
그날도 박찬호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을 먹고 필기구까지 챙겨 들고 당시 경인방송을 틀어 집중해서 보려던 찰나,
“엔간히 좀 봐라.”
청소하시던 엄마가 한마디 툭 던지셨다.
나는 “청소 내가 할게” 하는 대신 텔레비전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계속 청소를 하셨고 집안은 조용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시청 인사과로 전화를 했지만, 임용 시기는 잘 모른다는 답만 계속해서 듣던 차였다. 교사 임용고시를 보고 마찬가지로 발령을 기다리던 동생은 서점에 아르바이트를 나갔는데, 아침부터 소파에 정자세로 앉아 야구경기를 보는 내 모습에 엄마 속도 타긴 탔을 것이었다. ‘그래, 어지간히 보긴 봤다.’ 나는 잠시 소란했던 마음을 떨치고 어제 신문에서 표시해 두었던 영어 학원 광고를 펼쳐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학원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반팔을 입기에는 아직 이른, 봄의 끝 무렵이었다.
한편,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텍사스로 이적한 박찬호는 허리 부상으로 부진했고 언론에서는 그를 먹튀라고 비난했다. 부상으로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졌고 그동안 발령을 받고 바쁜 직장인이 된 나도 어느새 박찬호의 경기도 소식도 찾아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팬이 아니었다.
그 이후 박찬호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방학 때 내려온 동생이 그의 다큐멘터리를 봤다고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경기도에서 교사로 일하던 동생은 본가에서 독립해 살고 있던 내 원룸을 둘러보다가,
“언니 예전에 박찬호 좋아하지 않았어? 얼마 전에 다큐를 하던데 그거 보고 나니까 박찬호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더라.” 했다. 야구선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성숙한 인간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텍사스 이후로 박찬호는 계속되는 부상과 난조로 자신감도 잃고 주위의 냉대도 심해졌다고 한다.
“웬만하면 그쯤 되면 은퇴를 한대. 돈도 벌고 메이저리거로서 명성도 얻었으니까 국내 돌아오면 대접도 받고. 근데 매일 명상을 하더라고. 마이너리그까지 갔다가 다시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거가 됐고. 대단하지 않아?” 그즈음 동생도 나도 어느덧 직장생활 10년 차로 향하고 있었고 둘 다 지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힘을 다시 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유튜브로 그 다큐멘터리를 찾아보았다. 내가 팬이 아니었던 긴 시간 동안 박찬호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해답을 찾고 있었다. 검색해보니 미국,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선수로 활동했고, 2012년 마지막 경기를 했다고 한다. 승패가 전부인 시간을 지나 그의 진짜 팬들에게 끝까지 야구하는 모습을 보여준 그는 정상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아주 잘 찾아내었던 것이다.
다큐를 보고 나서 나는 박찬호의 팬이었던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 기억 속의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의 코리안 특급에서 예능 프로그램의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 캐릭터로 점프해 있었다.
“여기까지면 되었다는 순간 두렵고 부끄럽지만 모험을 해보는 거죠,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보면서요”라고 말하는 그는 그 점프된 구간 속에 있다. 그 시절을 몰랐던 나는 그의 팬이 아닌 걸까? 나 역시 그 시간 동안 잘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치고 있었고 판단과 비난에 취약해서 힘들었지만 견디고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어 진다. 문득 다큐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박찬호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
박찬호, 그는 역시 옹졸하지 않구나! 이제 방송인이 된 그의 아재 개그에 크게 웃어주겠다. 축구선수 이영표 선수와 아웅다웅 승부 근성을 뽐내며 예능에도 열심인 중년의 그에게 늦었지만 큰 박수를 계속해서 쳐주고 싶다. 나는 여전히 박찬호의 팬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