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 발자국

숙제하듯 살다가

by 다시 봄

벌써 8시간째 빈 화면에 커서만 깜박인다. 겨우 썼던 세 문단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워버렸다. 왜 내가 글을 쓰겠다고 했을까. 앞으로 얼마나 자주 절망에 빠지려고. 퇴직을 결정하던 그 순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회피였을까 마법이었을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장을 펴면 되었을 것을 하던 일을 덮어 버린 것은 무모한 결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무 대책 없이 나왔다는 거네.”

동생에게 퇴직을 알렸다. 우선 브런치에 써놓은 글을 카카오톡 링크로 보내주고 한 시간 넘는 통화를 했다. 놀람과 응원, 이유와 계획을 묻는 말이 오갔고 저 한마디가 결국 마음에 남았다.

추궁하는 톤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으면서 동생 스스로 정리하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전화를 끊고 나니 가슴 한가운데가 느리게 아파왔다. 쉽게 이해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연금수령 시기와 금액, 그때까지 먹고살 방편까지 ‘해명’하고 나자 진이 빠지고 원망이 솟았다.


공무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칼퇴근과 철밥통. 외부에서 보면 편하고 안정적인 꿈의 직장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기업에 다녀본 적이 없어 스트레스 강도를 비교할 순 없겠으나 마음 편한 기억은 별로 없다. 막무가내로 해달라는 민원을 욕 들어가면서 달래고 돌려보내는 일도 많았고 법의 경계에서 애매해진 일들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다. 조직에서 있기 마련인 이런저런 소문에 마음 뒤숭숭할 때도 있고 같은 사무실에서 매일 보는 직원들과 감정 상하지 않게 조심하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컸다. 퇴근 후에는 방전된 몸과 마음을 충전하기에도 바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나는 자주 휘둘리고 흔들리고 위축되었다. 어설픈 내가 싫었고 질투하는 내가 싫었다. 수용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센스 있고 유연하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는 평온을 가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매번 지적당하는 기분이었다. 부족한 점이 없는지에 신경이 곤두섰다. 다정함을 건네는 용기도 모자랐다. ‘나’라는 출발선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직장생활에 대한 불만에 앞서 나 자신과 불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성적에 맞춰 학과를 선택했고 백수탈출을 위해 공무원을 선택했다. 원했던 직업은 아니었지만 경제적인 독립이 주는 자유는 컸다. 수시로 올라오는 마음의 불편함 쯤이야 직장인이라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변 기대에 맞추고 사는 데 익숙해졌고 다른 꿈을 꾸기에는 일상이 만만치 않았다. ‘열심히’와 ‘최선’이 먹히는 세대였고 그렇게 살면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그 시간이 찾아왔다.


2020년 초, 20년 근무자는 명예퇴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목적 없이 성실한 내 인생에 태클을 걸고 싶었다. 과거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현재를 바꾸고 싶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2020년 8월에 퇴직자가 되었다. 이제 당분간 일을 하지 않는 삶이 이어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직에 들어가 정규직이 될 일은 없을 것이고 따라서 고정수입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규모가 달라진 앱 가계부를 쓰면서 그 사실이 불안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동생의 말이 아팠던 이유도 너무나 팩트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쾌하다. 이토록 가볍고 미미한 존재가 되어본다는 것이 내 나머지 인생의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애쓰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다. 앞으로 가는 것 못지않게 둘러가는 재미도 느껴보고 싶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려 한다고

괜한 헛수고라 생각하진 말아요.

내 마음이 헛된 희망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려 한다고

나의 무모함을 비웃지는 말아요......


변명하고 싶지 않고 눈치 보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될 때,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 일하지 않는 것에 주눅 들 때, 아무래도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인간인가 보다 하면서 이소라의 이 노래를 듣는다. 글이 써지지 않는 오늘 같은 날은 더욱.


출근하지 않는 삶이 되었다. 이제 지시와 업무는 없지만 벗어난 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숙제로 남았다. 잊고 싶은 것을 잊고, 버리고 싶은 것을 버리고 싶다. 나의 새로운 면모를 받아들이고 싶다. 내 자리에 서고 싶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 이제 한 발자국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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