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 성장

숙제하듯 살다가

by 다시 봄

지금까지도 나는 나를 바꾸고 싶어 한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살을 빼고 싶고 체력을 키우고 싶고 여유로운 마음도 갖고 싶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현재의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해서가 아니라 미워하기를 멈추기로 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내 감정의 반은 분노고 반은 불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나는 내가 뭘 굉장히 잘하는 인간으로 알고 살아왔다. 거기다 힘들단 말은 잘 못 하고 맡은 일은 어찌 되었든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 몰아붙이는 편이었다. 잘 배운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작되는 것인데,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혼자서 끙끙거리다 보니 결국 결과를 내기는 했지만 도와주려고 지켜보던 사람들을 코웃음 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칭찬받을 줄 알았던 행동은 차갑다는 인상만 남겼고 그 간극 속에서 내 마음은 서늘해졌다.


분노도 불안도 어찌 되었든 에너지가 되었다. 사이좋게 하든 혼자서 하든 할 일만 해내면 되는 조직 생활이었기에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했다. 간혹 거친 내 생각과 행동 사이로 보이는 진심 같은 것을 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위안이 되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떠나는 해외여행으로 잠깐이지만 숨통을 틔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본질적인 무언가가 충족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직장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었다. 평온한 얼굴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속마음이 얼굴로 표현되는 미성숙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성당에 다녔었던 나는 그럴 때만 하느님을 찾았다. 분노와 불안의 버튼은 끄고 새로운 에너지로 살고 싶었다.


그즈음 직장에서 고참 직원이 되어 있었고 업무에 자신감도 붙었다. 그래서였을까.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반신반의하며 불안해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에서 독서심리 상담 수업을 1년간 들으며 심리 관련 책을 읽었고, 수료 후 독서심리상담사 3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수업을 통해 과거를 내 언어로 결론짓는 것이 필요했다는 걸 알았다. 겉으로 그럴싸해 보이기 위해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는 것도.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 아이’의 불안과 분노를 그대로 가지고 어디 둘지 몰라 품고 있었고 그래서 매번 현실에서 사소한 문제에도 전전긍긍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는 나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처음 갖게 되었다. 그런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어 좋았다. 잡고 있던 것을 떠나보내고 나니 가벼워졌다. 잘 못하고 실패해도 내가 책임지면 될 내 인생이었다. 기대와 부응이란 틀도 이제 필요 없다. 원망과 죄책감도 바스러진다. 나와 내 인생 사이에 생긴 틈으로 산들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김성령 배우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필라테스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 서핑에 도전하고 성공하는 모습, 요리에 서툰 허당미까지. 패널들은 감탄했다가 응원했다가 손뼉 치며 웃는다. 연예인의 삶이고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어쨌든 마음속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50대의 그녀가 유연하게 서핑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파도와 힘겨루기 하며 흔들흔들하면서도 버티는 모습이 멋졌다. 나이에 갇히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에 나도 힘을 내고 싶었다.


예전에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현재에 대한 불만족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나로부터 시작해볼까 하는 설렘에 방점을 두고 싶다. 한 가지 마음으로 불편하면 다른 마음도 먹어보면 될 일이다. 평온한 얼굴은 무언가에 무심한 얼굴일 수도 있다. 불편한 마음은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다. 잘해보려고 긴장하는 마음은 조금 더 데리고 있고 싶다. 어깨 힘은 조금 빼고 씩 웃을 수 있는 연습은 더 하고 싶다. 순풍이든 역풍이든 불어오면 흔들리면 될 것이다. 더딘 성장이지만 솔직히 반갑다.


keyword
이전 07화이제 한 발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