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

숙제하듯 살다가

by 다시 봄

오늘의 운세 보기를 좋아했다. 출근하고 첫 일과였다. 네이버에 접속해서 오늘의 운세를 누르고 띠별 운세와 별자리 운세를 동시에 보았다.


당신의 덕 있는 선행이 결실을 약속할 것입니다. 타고난 성품이 주위에 사람을 모이게 하고 화평한 기운을 감돌게 하니 늘 좋은 일이 떠나지 않습니다. 꿋꿋이 밀고 나가십시오. 당신의 끈기 있는 도전이 머지않아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덕 있는 선행’은 기억도 나지 않고 ‘타고난 성품’은 항상 의심 중인데도 ‘결실’이 있고 ‘화평한 기운’을 보장받으니 하루를 버틸 맛이 났다. 때로는 ‘말조심을 해라, 예상외 결과가 있을지 모르니 너무 낙담하지 마라’는 운세가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그래, 좋은 일이 뭐 있겠어. 조심하며 살자’ 하며 창을 닫는다. 어느 쪽으로든 운세보기는 모닝커피처럼 아침을 깨우는 나름의 의식이었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운이 있다는 날도, 구설수가 있을 수 있으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날도 기억에 남는 일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만난다고 했던 귀인을 못 만나 실망하지도 않았고,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는 말도 읽고 흘려버렸다. 그러면서도 매일 오늘의 운세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환기였던 것 같다. 좋은 운세를 보고 나면 왠지 기운이 나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도 갑자기 관심이 생기고 괜히 다정한 말도 건네게도 된다. 몇 시간은커녕 몇 분도 못 가는 다정함일지라도 그 순간에 내가 다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고 할까? '사무실에서는 일만 하자, 그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며 삭막해져 가고 있던 마음에 눈곱만큼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로 시답잖은 말 걸기가 시작되어 주거니 받거니 하면 숨쉬기가 편해졌던 것 같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과 말을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때 안심이 되었다. 안전한 거리두기는 인간관계에서 상처 안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겠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충족되지 않았다.


직장생활에서 일만큼, 아니 일보다 중요한 인간관계. 대체로 그 사람의 평판은 같이 일 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일 때 달라졌다. 멀리서 보면 그냥 괜찮은 사람이었다가 가까이서 일 해보면 아닌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부드럽다, 여우 같다, 일을 잘 챙긴다, 자기밖에 모른다, 정치적이다, 똑똑하다, 속이 깊다, 일은 별로다, 뺀질거린다, 꼼꼼하다, 기획력이 있다, 오지랖이 넓다. 싹싹하다 등등 무수한 평판의 말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결국에는 본인에게로 전달된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말은 ‘사람은 좋다’는 거였고 가장 예민했던 말은 ‘무난하다’는 것이었다. 전자는 일이 뒤처질 때 주로 따라붙는 말이었는데, 한 사람 몫을 못 하면 주위가 피곤한 법인데, 거기다 인성은 좋으니 미워하지 말라며 내 아량까지 요구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후자는 내가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해서 거부감이 있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 대한 판단도 날카로웠던 시절이 길었고,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 못되었기에 무난함을 향한 갈증이 깊었음에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무난함이 결코 쉽지 않아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다. 결국 나는 ‘유용하지만 안 무난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것 같다. 조직에서 그 정도면 됐다 싶었다. 일 인분 하는 사람이면 됐고, 마음이 쓸쓸한 건 감수해야지 했다.


내가 다가간 것보다 더 다가와 주는 사람도 있었고 꺼내 보인 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차가운 사람도 있었다. 다가오면 움츠러들고 차가우면 더 다가가려 하는 계산 안 맞는 관계를 되풀이하기도 했다. 맞지 않는 관계는 자연히 멀어지고, 이어지고 싶은 관계는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면서 하루가 가고 한 해가 갔다.


오늘의 운세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윤활유가 필요한 아침은 사라졌다. 주문한 책들이 쌓여있고 작은 프린터기도 책상 위에 놓였다. 달려오던 속도를 끼이이익 늦추니 잠깐 속이 울렁거린다.

‘걷는 사람 되기, 하루에 15분 글쓰기, 일주일에 책 한 권 읽기, 문장 모으기......’ 보드판에 끄적인 글자들을 바라보다가 동갑내기 B가 퇴직 선물로 준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다시 펼쳐본다.


이 소설을 선택한 이유가, 자신은 ‘이곳’에 남고 나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다. *자기가 선택한 바로 그 궤도를 달리는 게 인생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인간에겐 허용되지 않는 교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단지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는 이제 ‘새로운 곰스크’가 생겼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 프리츠 오르트만,『곰스크로 가는 기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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