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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요리치료연구소 Aug 15. 2019

다 엄마 덕분입니다.

낙천이고 긍정적인 우리 엄마

엄마 때문에, 아니 엄마 덕분입니다.



파킨슨병. 

어떤 원인에 의해 뇌 기능의 이상을 일으켜 신경퇴행성 질환으로 알려졌다. 불수의적인 떨림 현상이 눈에 띈다. 수저를 들거나 물컵을 들었을 때 현저히 나타났다.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을 보고 있으면 불안불안하다. 많이 흘리기도 한다. 일어서거나 걸을 때 불안정해 보인다. 처음에 눈에 띤 엄마의 증상은 숟가락질이었다. 유난히 흔들리는 수저질은 '설마'가  '역시'나로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눌한 말투와 운동신경의 둔화와 강직은 자세의 불안정과 느림을 가져 왔다. 엄마는 가만히 있어도 오른 손이 흔들리고 아래턱이 심하게 떨리는 증세까지 왔다. 마음 속에 의도한 동작이나 일을 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세수하고 이닦고 샤워를 하는 일상의 일도 시간이 많이 걸림을 알았다. 전화를 하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받으셨고 듣고만 계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도 입안에서 맴돌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다가 엄마는 넘어진 것이다. 재작년 여름에  길바닥에서 쓰러지면서 턱을 부딪혀 얼굴이 달덩이만큼 부풀어 올랐고 앞니가 부러졌었다. 얼굴의 멍과 타박상으로 오랜 고생을 했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지루함을 달래고 케어해 주는 복지사들이 있으니 안전을 위한 선택이 주간센터이었다. 주간센터에 오전-오후로 출퇴근하면서 엄마는 또 넘어진 것이다. 



한 달.

엄마가 입원한 지 한달이 되었다.입원한 지 한달이 되었다는 것은 엄마를 뵌지가 한달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엄마의 입원 소식을 듣고 눈물반 콧물 반을 빼면서 떨리고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내려 갔었다. 하얗게 누워 계시는 엄마응 뵙는 순간 그 동안 엄마는 내 딸이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내려오지 않음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에서 간병사를 두었고 가족이 해야 될 일은 딱히 없다고 오라버니가 말했다. 눈물 반 콧물 반으로 엄마를 뵙는 시간은 고작 2~30분이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의 불안.

'엄마 뵈러 가야지~' 대구로 내려 가야겠다는 그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물론 가슴은 방망이질 쳤고 숨이 가빠 호흡이 어려워짐을 느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구해 보지만 그냥 불안한 것이었다. 입원 중인 엄마를 뵈러 가는 일이 뭐 그리 불안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나는 흔들렸다. 다시 시댁으로 돌아와 식사도 준비하지 못한 채 방에 콕 박혀 웅크리고 긴 잠에 빠졌었다. 긴장이 풀린 탓이리라.

그리고 한 달이 다가왔다. 엄마를 뵙고 떠나올 때는 눈물 속에 다짐한 약속, 다음 주에 다시 내려 오겠다고 했었는데 2주, 3주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버렸다. 대구를 가려고 날만 잡으면 뭔 비가 그리 많이 오는지, 비가 오는 날이면 더 가라 앉는 마음 때문에 차를 갖고 떠날 수 가 없었다. 기차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타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가는 도중에 아름다운(?) 사태가 벌어질까 봐 불안했기에 날씨가 화창하기를 기다리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다.




바뀐 생활

한 달 만에 엄마를 만났다. 아흔을 바라보는 엄마는 그나마 당신 발로 걸어 다니셨다. 입원 한달 전부터 주간센터에 다니셨다. 엄마는 파킨슨을 앓고 계신다. 그럼에도 관리를 잘 하셔서 당신 몸을 간수 할 정도는 되셨는데 아침에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하는 일이 아마도 큰 스트래스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그러하듯이 센터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이용자들은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무엇인가를 함께 움직여 주어야 한다. 엄마의 파킨슨병은 당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손이 엄청 떨리고, 몸이 느리게 움직이고, 하고 싶은 말도 입안에서 맴돌 뿐  얼른 나오지 않는다.  신체적, 언어적으로 많이 어눌하다. 센터에서의 한 달 남짓한 생활은 엄마에게는 긴장과 스트래스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그램실로 이동하거나 화장실을 갈 때도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춰 움직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프로그램 진행 중에 뭔가를 하는 작업도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기싫어도 계속해야 되는 상황도 있었을 거라는 엄마와의 전화 대화로 미루어 볼때 짐작을 하게 한다.


'엄마 올만에 학교 가니 재미있어요?'

'나 가기 싫다 안갈란다.'

'가기 싫으면 안가셔도 돼요 가지 마 엄마!'


급기야 센터에서 소변을 옷에 지리는 실수를 몇번 하셨다 한다. 깔끔하신 엄마가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싶었다. 얼른 화장실 가야지 생각했을 것이고 마음과 몸이 엇박자가 나면서 일어서다가 엉덩방아를 찧어 허리가 나가 버렸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집에 돌아와 몸져 누워 그날부터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구급차가와서 엄마를 싣고 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침대에 그대로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치매증상

엄마가 입원한 병실은 6인실이다. 모두 할머님들이다. 엄마는 저녁만 되면 헛소리를 했다. 누가 왔다고 자꾸 문을 열라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병동을 들었다놨다 하기를 이틀. 급기애 수면제 처방이 내려졌다. 수면제 처방이 없으면 퇴원을 해야 할 판이었다. 지난 여름 길바닥에 쓰러졌을 때 엄마를 뵙던 날, 엄마랑 이틀 밤을 잤다. 그 날도 엄마는 주무시다가 벨소리가 난다고, 누가 왔다고, 문 열어 부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한 밤중에 문을 열어 확인을 시켜 드렸는데도 계속 문 열어 보라고 했었다. 그 증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지금 병원에서도 계속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증상으로 입원한 지 한 달이 되었다. 뽀얗게 누워 계시는 엄마는 내가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딸은 부르지도 않고 사위부터 찹았다. 정신은 좀 맑아지신 듯 했다. 허리에는 가슴팍까지 오는 보호대를 차고 옆으로 돌아 눕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간병 여사님은 많이 좋아지셨다고, 식사도 잘 하시고, 대소변도 잘 보신다고 했다.




진짜 딸은 없다.

엄마는 엄마를 돌보시는 간병사에게 딸이라고 불렀다. 우리 딸 어디 갔냐고 찾으신다고 옆에 계신 할머니가 전해 주셨다. 하긴 멀리 있는 딸보다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는 사람이 진짜 딸인듯 싶었다. 그것이 돈을 지불하느냐 안하느냐를 떠나서 말이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간병 여사님께 90도 허리 숙여 마음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대소변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몸을 닦여 주고 식사를 챙겨 준다. 마치 입안의 혀처럼 해 주는 사람, 이 분을 엄마는 당신의 딸이라고 부르고 계셨다.

'우리 딸 어디 갔노 나 오줌 눗다..'

 



불안의 연속

한 달만에 두 번째로 병원을 방문하는 날, 주차장에서 차에 내려 병원 건물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식은 땀이 났다.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내내 휘청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로 달려드는 듯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안이 갑갑했다. 입원실이 4층이라서 다행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터질듯 했다. 고작 2~30분 엄마를 만나고 다시 시댁으로 왔는데  그대로 쓰러졌다. 긴장, 불안,  엄마를 만나는 일인데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지, 마음에 깔려 있는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부터 건강해져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는 멀리서 내려온 딸이 올라 갈 일을 걱정했다. 울면서 갈 딸에게 울지 말고 가라고 다독이기까지 하셨다. 30대 초반, 내 아이를 키우다 지치고 힘들어 죽고 싶었을 때 그래도 니 팔자라면 받아들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는데 이제는소리도 힘도 빠진 종이 호랑이가 다 되셨다. 외손주가 이뿌고 안쓰러워서 봐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 딸이 힘들까봐 안쓰럽고 마음이 쓰여 딸집에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케케 묵은 그 시절에는 엄마가 나의 정신적 지주였는데, 지금 그 시절의 엄마 나이보다 더 먹은 딸은 그래도 엄마의 그늘에서는 약하고 약한 존재임을 느낀다. 엄마를 보면 맘이 짠하고, 생각하면 눈물이 맺히지만 또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보내면 언제 그러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 잊고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가슴 한 켠에는 '가야지 엄마보러 또 내려가야지' 를 펼쳐 놓고 날만 잡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잊은 듯 잊은 채 내 할 일을 하고 있다.



사랑합니다.

'얼른 올라 가라 비올라 한다. 가거라 어서 울지 말고 가라 울지 말거라'

한 달만에 내려 온 딸을 엄마는 또 서둘러 올려 보내려고 한다. 지난 번에도 울었고 어제도 울었다. 다시 올라 와야 하는 딸에게 울지말고 가라는 엄마 말에 울음 섞인 소리로 '또 내려 올게요' 라고 두 손을 꼭 잡았다. 그 약속이 또 언제 지켜질 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달려 갈 수 있도록 그 자리에 계셔 주심에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다음주에 언제 갈까 달력을 펼친다. 엄마, 엄마의 강인한 피를 물려받아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다 엄마 덕분입니다. 사랑합니다.




20190815권명숙글

엄마를 뵙고 오는 날이면 더 우울합니다. 엄마의 표현대로 하나 뿐인 딸은 늘 남입니다.

멀리 있다는 핑계를 대 보지만 엄마와는 아직도 못다한 뭔가가 남아 있는 듯합니다.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엄마, 젊은 날, 엄마 때문이라고 원망했던

앙칼진 딸이, 그럼에도 내가 제몪을 하는 아들과 잘 살아 가고 있는 것은

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엄마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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