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굿대디 Oct 24. 2020

남자의 디폴트 값

아들을 보면 아빠가 보인다

"자.. 한번 볼게요...! 가운데 여기 뭐가 보이시죠?"

"네...?"

"아기 옷은 파란 옷으로 준비하셔야겠어요~"

"...!"


초음파검사실에서 은근히 말씀해주시는 아기의 성별. 첫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원에서 가족상담학과 전공 수업을 들으며 가장 궁금했던 이론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진짜 가능한 이론인가'였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아들은 태어나서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쉬운 사랑은 없듯이 엄마에겐 아빠라는 존재가 있다. 아들에게 생애 최초 라이벌이자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아빠는 가장 강력하고 우월한 존재이기에 아빠를 모델링하여 성장한다. 언젠가 사랑하는 엄마를 독차지하기 위해...


신화 속 인물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빗대어 만들어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야기는 총각시절의 나에겐 '그저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된 나에게 이 이론이 새롭게 와 닿았다. 아버지를 통해 남성의 상을 형성하는 아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를 닮아 가는 나의 아들을 통해서가 아닌, 나의 모습 속에서 비친 나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최초로 남성의 상을 모델링한 사람은 바로 나의 아버지일 것이다. 나의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아버지가 있다. 그렇기에 나의 남자 디폴트 값은 '아버지'이다. 나는 성격이나 입맛, 생김새와 말투까지 어머니를 더 닮았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의 연결고리는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하지만 나에게 자식이 생기고 나니, 내 아버지가 나에게 해줬던 그것을 그대로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꽤나 가정적인 남편이다. 어린 시절 기억나는 아버지는 앞치마를 하고 부엌에서 요리를 해주거나 아들들 앞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모습이다. 호빵맨처럼 둥그런 얼굴에 광대는 동그랗고 빨간 아버지는 사랑이 많은 남자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춤을 추는 아버지. 이러한 가풍 속에서 자라서 인지 나도 집안일하는 것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빨래를 돌리고 너는 것, 마른 옷가지와 수건을 개고 제자리에 넣는 것,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바닥을 쓸고 닦는 것, 음식을 먹으면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하는 것, 설거지를 하고 수채통을 비우는 것,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해서 배출하는 것 등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들이다. 다행인 것은 나에겐 이런 것들이 심리적으로 어렵지 않다. 그저 가족 중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일 뿐이다. 내가 아니면 아내가, 아내가 아니면 내가 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집안일이 억지로 에너지를 짜내야 하거나 생색낼 거리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기에 아직까지 집안일 문제로 부부관계에서 다툼이 일어난 적이 없다.


나의 아버지는 조금 일찍 퇴직을 하셨다. 그때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몇 년 후 내가 군 전역할 즈음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9년이란 긴 시간 동안 대학교를 다니고, 서른이 넘어 졸업식을 할 때 아버지는 "알아서 잘 커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할 때, 부모님은 나의 결혼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함을 미안해하셨다. 대신 축의금을 결혼 생활에 보태라고 주셨다. 결혼 초에는 경제적으로 기댈 수 없는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결혼 생활이 이어질수록 나는 흔한 집 한 채 값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삶의 자세를 물려주신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다. 돈 주고도 못 살 귀한 경험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내렸다. 그리고 나에게 가족이 생겼을 때 그 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나는 아들을 바라본다. 나의 모습 하나하나가 아들이 이룰 미래 가정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들이 남편 또는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할 때 입력될 디폴트 값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 조심해야 하고, 더 참아야 하고, 더 성숙되어야 함을 다짐한다. 나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아들에게 선하고 좋은 것들을 물려주고 싶다.


이전 02화 30대 아재의 컴플렉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