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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대디 Oct 20. 2020

마지막 오늘

건강염려증이 가져온 선물

“아빠 다녀올게!”

“아빠한테 빠이빠이하자~”

“빠!”


가끔 서울로 미팅을 나갈 때가 있다. 복잡한 시내운전을 생각하면 지하철을 타고 싶지만, 지하철로 이동하기엔 시간이 아까워 자차를 이용한다. 나는 혼자 자동차로 외출을 할 때 꼭 하는 행동이 있다. 바로 아들을 꼭 껴안고 속으로 짧은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포옹을 하고 무언의 눈빛을 보낸다. 혼자 아들을 보게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응원을 담은 눈빛이다. 이런 나만의 작은 의식은 혹시라도 나에게 불행한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이걸 ‘마지막 인사’라고 부른다.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들이 생기고 난 이후인 것은 확실하다. 세상과 처음 마주한 아들의 가냘픈 손을 봤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아내와 놀며 웃는 꺄르르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였을까. 나에겐 약간의 건강염려증이 있다. 내가 두 살 때 함께 살던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중학교 2학년 때는 뇌출혈로 엄마가 쓰러지셨었다. 지켜야 할 가정이 생기고 나니 그때의 그림자가 내 무의식 어딘가에서부터 스멀스멀 나타난 것 같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그림자 말이다.

[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오늘 무엇을 남길 건가 ]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내 책상 앞에 붙여놓은 문구이다. ‘만약 내가 당장 지금 죽으면, 아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라는 생각에서 써놓은 다짐이다. 이 문구를 붙인 이후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아들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기 위해 만화와 일러스트,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아빠는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보여주기 위한 흔적들이다. 때에 따라 중단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시작한 ‘마지막 인사’와 ‘흔적 남기기’이지만, 덕분에 나는 삶에 대한 감각이 변화되었음을 느낀다. ‘마지막 인사’는 사소한 불평, 불만을 사그라 트리고 가족에 대한 감사를 느끼게 해 준다. 나와 함께하며 나를 성장시켜주는 아내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우리 부부에게 찾아온 아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느끼게 해 준다. 이 효과는 내가 정말 몸이 지치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에 빛을 발한다. 피곤에 쩔어 빨리 침대에 뛰어들고 싶은 날, 아들이 안아달라고 보채더라도 그 순간 ‘이게 마지막으로 안아주는 걸 수 있어.’라는 마음이 들면 없던 힘도 솟아난다. 내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아빠가 아닌 최대한 한결같은 아빠가 되어주기 위한 노력이다. ‘흔적 남기기’는 일상에 특별함을 부여한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마크 러팔로는 이런 말을 한다. ‘난 이래서 음악이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바로 음악이야.’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려면, 일상 속 빛나는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 이거 소재로 괜찮다.’라고 떠올릴 수 있다. 그럼 자연스럽게 가족의 식사 중 대화, 아내가 아들에게 책 읽어주는 소리, 아내와 아들의 눈빛과 몸짓까지도 특별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가족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주도의 한적한 동네로 한달살이를 한 적이 있다. 마침 여름 장마가 시작되어 한 달의 절반은 먹구름과 비바람이 몰아쳤다. 궂은 날씨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유모차에 아들을 태우고 아내와 해안도로를 산책했다. 산책을 하며 처음으로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그 자리에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들이 울 때보다 더 큰 소리로... 그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으려는 듯 당황하며 아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달랜다며 하는 말이 ‘어차피 사람 일은 모르니까’라는 말이었다. 참 의지하기 어려운 모자란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의 터널을 지나고 나니 삶을 보는 눈이 바뀐 것이다. 이제는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편이 되었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지금에 더 집중하는 남편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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