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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베어 Aug 23. 2024

나의 세 번째 육아휴직


두 번의 출산과 세 자매

  

  우리는 2019년 2월에 첫째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 당시 나는 출산휴가와 육아 휴직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생후 3개월이었을 때 그는 7년 정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나는 몸이 힘들면 조금 버텨보고, 마음이 힘들면 그만두는 것이 맞다고 제안하였다. 대학교 동기였던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였는데 소규모 회사였고, 회사 사정 또한 그리 좋지 않아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퇴사하였다. 이후 3개월 정도 쉬고 나서 이번에는 대학교 후배가 운영하는 동종업계의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20년 봄, 그러니까 복직하여 한 두 달 뒤 적응을 하던 시기에 나는 두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고 20년 12월 출산을 열흘 앞두고 다시 출산 휴가와 육아휴직을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들 무게만 5.5kg이 되어버렸고 자궁문이 이미 열려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위험하기 때문에 당장 낳아야 한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출산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에서 연년생 쌍둥이 세 자매라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만들어졌다.


  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거의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는데, 작은 아버지는 세 쌍둥이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태어난 아이들은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지금의 작은 아버지만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그 동생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다 나의 쌍둥이 임신 소식을 듣게 되니 자신의 동생이 환생이라도 한 것 마냥 좋아하셨다. 이미 한 번의 육아를 경험하니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차에 쌍둥이 임신은 나에게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으나 가족들은 모두 기쁘게 응원하였다.




육아 그리고 코로나


  2020년 1월 코로나의 대유행이 시작되었다. 국내외 출장이 많았던 그가 일을 하던 그 업종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그는 20년 3월부터 육아휴직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와 바통 터치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1년 가까이 육아 휴직을 쓰고 돌아갔는데 완전히 적응하는 데에는 두 달 정도가 걸렸다. 순번에 밀려 어린이집에 가지 못했던 첫째 아이는 그가 가정보육을 하였고 그 사이 나의 뱃속에서는 쌍둥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쌍둥이 자매의 존재는 나에게는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고, 키울 것을 생각하니 점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육아휴직은 아이 한 명 당 1년씩 쓸 수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육아휴직을 21년에도 연장할 수 있었다. 출산 후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출혈이 많아 구급차를 타고 중환자실에 입원까지 해야 했던 내 입장에서는 육아휴직이라는 제도를 쓸 수 있는 그의 상황이 고마웠다. 돈도 돈이었지만 아이들을 부모가 함께 케어할 수 있다는 장점은 무엇보다 큰 것이었다. 쌍둥이의 돌이 되기 한 달 전인 21년 11월, 나는 회사에 다시 복직하였다.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두 번이나 휴직을 하고도 받아주는 회사가 내 입장에서는 고마웠다. 이후 아이들은 성장하여 어린이집에 갈 수 있었고, 그는 22년 말까지 육아휴직을 연장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동종업계의 일을 아르바이트로 하곤 했다. 생활비가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생활은 유지되었다.




  '긴 육아 휴직이 그를 무능하게 만들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처음 그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가 해왔던 일은 그리 오래 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N잡러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지속 가능한 직업을 택해야 내 마음도 놓일 텐데...라는 생각을 가끔 하였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 계속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우리는 결혼도 늦었지만 아이도 늦게 낳아서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 즈음이면 그는 칠순 잔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그에게 미래에 대한 질문을 하면 그는 하고 싶은 일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였고, 나중에는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회피하였다. 그러다 코로나와 그의 육아휴직이 겹치게 되면서 시간은 점점 흘러가 버렸다. 그렇게 그는 집안일과 육아에 열심히 전념하게 되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도박에 손을 댔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육아휴직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코로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육아휴직과 코로나가 핑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성실함을 그래도 믿었다. 비록 도박에 손을 대긴 했지만 책임감과 성실함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없다.




나의 세 번째 육아 휴직 때문에
도박을 멈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 번째 육아 휴직을 쓴 지 두 달이 채 안되었을 때였는데,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 점심때 즈음 나는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었다. 집으로 등기가 날아왔다. 그가 쓰고 있는 카드사에서 온 등기였는데 그 카드는 예전에 내가 없애야 한다고 했던 신용카드였다. 분명히 없애라고 했던 카드사에서 등기가 날아왔기 때문에 나는 뜯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카드 현금서비스가 연체된 내용이었는데 60만 원을 사용했는데 연체가 되어 300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금액 자체도 이해가 안 되었다. 현금서비스는 내가 절대 받으면 안 되는 거라고 결혼 전부터 이야기했던 건데... 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야 했다.


  "카드사에서 방금 등기를 받았는데, 혹시 현금서비스받았어? 근데 연체 이자가 훨씬 많은데 이게 뭐야?"

  "카드사? 아... 그거... 상황이 좀... 꼬여서 그렇게 됐어. 내가 이따가 설명할게."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히 없앴다고 들었는데 카드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데다가 연체까지 했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에 나는 육아휴직을 쓰고 있어서 우리의 소득이 줄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그에게 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찌 보면 큰 일은 아니었는데 그는 나와의 통화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뛰쳐 들어왔다.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된 상황을 나에게 들켰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회사에 있었다고 했는데 굳이 그렇게 금방 집으로 온 것도 의아했지만 갑자기 최근에 사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장님과 실수로 사다리에서 작업하는 사람을 쳐서 떨어졌는데 고급 세단 위로 떨어져서 합의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돈은 급한 대로 카드에서 현금서비스를 받아 합의 중이며 회사에서 돈이 나오면 주기로 했다고 했다. 시아버지께도 똑같이 둘러대고 돈을 빌렸던 내용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월급도 좀 밀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당장 쓸 생활비가 없는데 급여가 밀리고 있다면 빨리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육아휴직 중이어서 소득이 줄었는데 그 회사까지 입금이 안되면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냐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많이 재촉하였고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는 갑자기 돈 얘기할 때마다 부담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으면 되겠냐는 이상한 극단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너무 닦달하였던 게 미안하긴 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나는 매우 당황하였다. 우리가 결혼한 지 8년이 되었지만 그가 울먹이며 불안해하는 모습은 그날 처음 보았다. 내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던 그는 아마도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걸리기 힘들었겠지만 육아휴직을 쓰고 집에 있으면서 거짓말이 조금씩 탄로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생각에도 회사 사정이 안 좋아지고 있으니 그만두는 게 좋겠다며 이번 주까지만 나가고 다음 주부터는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주 토요일이 되어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100만 원으로 마지막 코인 선물거래를 하였다. 모든 돈을 날린 날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이 되어 우리 가족은 놀이터에서 평범한 주말을 보냈고 밤이 되어 온 가족이 잠에 든 새벽 시간, 그는 계획대로 집 밖으로 나가 나에게 유서를 보냈다.




나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처음은 아니었다.


  우리는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연년생에 쌍둥이였던 아이들을 키우느라 너무 힘이 들었다.

  그는 다행히 살아있었고, 집으로 함께 돌아온 우리는 거실에 앉아 이야기했다.

  "오빠.. 우리 여기 이 집에서 아이들 얼마나 힘들게 키웠어. 그랬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나도 함께 울었다.


  늘 조마조마한 상황이었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며 살았는데 모든 상황을 털어놓은 그는 속이 많이 후련하다고 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힘들 뿐이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했다. 앞으로 열심히 살면 그만인 것이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분노가 치밀어 그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가 이렇게 살면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울증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예민한 성격인 나는 계획대로 안되면 화가 나고 나 자신이 발전 없이 뒤처진다고 생각이 들면 우울해지고 하는 그런 성격이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여도 예민한 내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세 번째 육아휴직 기간 동안
우울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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