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시아버지의 가게에서 도매와 소매 유통업을 하였다. 장사를 하려면 자본금도 많이 필요하지만 장사가 안 돼서 피 말리는 상황을 많이 접하다 보니 장사는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자영업은 시작하기도 어려웠지만 유지는 더 힘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던 그는 자본금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미래가 불안했던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종종 잡코리아, 사람인, 알바몬 등의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보곤 했다.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에는 마흔이 넘으면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마흔을 넘겨보니 미래에 대한 고민이 그때보다는 훨씬 많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초보가능/고소득
한 구인 광고 사이트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초보가능, 고소득이라고 쓰여 있었다. 생수 배송이었다. 말 그대로 다른 품목은 없고 오로지 생수. 생수 업체가 그렇게 많은지도 처음 알았지만 대충만 봐 왔던 생수는 200ml부터 2L짜리까지 생각보다 종류가 참 많았다. 예전에 그가 육아휴직 중이던 때에도 배송 업무는 어떨까 하고 한번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1리터는 1킬로그램이므로 무거운 생수를 가득 실은 탑차를 운전하는 것은 물론 무거운 것을 계단을 통해 나르는 것은 상상만 해도 힘든 것이었다. 적극적이지 않았던 그를 대신해 나는 여러 검색 끝에 연락처를 알아내어 그에게 전달하였고, 그는 면접 날짜를 월요일로 잡았다. 그 면접 날은 그가 유서를 쓰고 나간 날이었다. 경찰이 어디 갈만 한 곳이 없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 면접 약속이 떠올라 그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혹시 연락이 오지 않았냐고 찾기도 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면접 일정을 잡고 면접을 본 뒤 바로 계약서를 쓰고 왔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생수를 배송하는 기사
배송 기사일을 하려면 우선 1종 면허증이 있어야 하고, 적성검사를 받아 화물운송자격증을 따야 하고, 자격이 갖추어지면 계약금을 내고 화물 탑차를 임대한 뒤 사업자등록증을 받아야 한다. 탑차를 끌고 자정 즈음 물류 센터로 출근하여 수량에 맞춰 여러 종류의 생수를 싣고 새벽부터 오후까지 배정된 지역에서 배송을 마치면 일이 끝난다. 그런데 그 일을 하기 위해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탑차를 주차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 주차장과 공영주차장을 전부 찾아보았다. 결국 우리 집에서 십분 거리에 공영주차장 밖에 자리가 없었지만 그마저도 감사해야 했다.
배송 중간에 취소분이 나오기도 하고, 일부 아파트는 입차를 못하게 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다세대나 빌라는 5층까지 계단으로 걸어가야 한다. 2리터짜리 여섯 개가 한 팩인데 한 손에 한 팩씩 들 수 있기 때문에 세 팩 이상이면 두 번 왕복해야 한다. 초보일 때는 종류가 너무 많아 헷갈려서 오배송을 하기도 했다. 주문하는 사람이 실수로 주소를 잘못 적는 경우도 있고, 새벽에 도착한 배송지는 비번도 없이 문이 잠겨 있기도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은 대부분 꼭대기 층에서 주문을 하고, 가끔 차 문이 열려 있으면 절도인 줄 알면서도 훔쳐 가기도 한다고 했다. 오배송이든 절도이든 어쨌거나 모두 배송 기사의 책임이다.
일을 시작하고 이틀 째, 직접 보지 않으면 정확히 어떻게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봤다. 그에게는 처음 해 보는일. 체력 소모가 많은 일. 이렇게 막연하게 상상만 되었다. 아직 자신이 맡은 지역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여기저기 랜덤으로 배송 중이었는데, 그날은 경사가 엄청나게 심한 언덕에 도로도 좁아 차가 겨우겨우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동네였다. 고바위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눈으로 보고 나니 나는 막상 응원의 메시지는커녕 그에게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아니, 이렇게 배송하기 어려운 데는 정수기 써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나는 뭐 먹고살아."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우리 집은 얼음정수기를 쓴다.
그가 배송을 다니는 동안 나는 조수석에 앉아 주변을 지나다니는 다른 배송기사들의 인상착의를 유심히 지켜본 뒤 비슷한 상하의와 팔토시, 헤어밴드 등을 찾아 주문하였다. 하루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할 것 같아 간식도 함께 주문하였다. 내가 그에게 도움줄 수 있는 것이 더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배송을 완료하면 함께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아이들 하원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먼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힘들지 않다며 해맑은 표정으로 이따가 보자며 인사하였지만, 지하철역으로 가는 나는 한숨이 나왔다.
자정에 출근하여 오후 5~6시쯤 퇴근하며 하루에 평균 18시간의 강도 높은 생수 배송일을 시작하고 나서 한 달 뒤 그는 10킬로가 빠졌다. 이러다가 과로사로 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한때 회사 후배들이 전화로 보는 점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에게도 한번 보라고 권유하여 우리는 각각 전화로 점을 보았다. 그 점쟁이는 남편 명이 엄청 길다고 했었고, 남편은 돈이 줄줄 새니 모든 경제권과 명의를 내 것으로 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가 과로사로 죽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이 들었다가도 가끔 그 점쟁이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미래의 직업
ESTJ인 나는 나와 그의 미래에 대해 늘 고민하였다. 급여가 높으면서도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 ISFP인 그는 미루고 미루다 결정하기 직전 고민하는 타입이었다. 8년을 함께 살았지만 거의 반대의 성격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입금이 돼서 생활비로 쓰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고, 육아휴직 급여로 다섯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소득이 적어 결국 나는 면접을 보기로 했다. 육아휴직 중에는 150만 원 이내의 소득이면 파트타임은 가능하였다. 디자인이 전공인 나는 가정방문 미술수업을 하는 교사를 해 볼까 하여 면접을 보러 갔는데 그 일은 오후 4시~ 6시가 피크타임이었다. 내가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배정되는 일이긴 했지만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오면 7시가 다 될 것 같았다. 남의 아이를 보다가 내 아이를 못 보게 되는 상황. 게다가 친정엄마가 대신해서 고생할 생각을 하니 그냥 집에서 아이들을 케어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포기하게 되었다. 커리어를 쌓으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쉽지만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나는 현재까지 육아와 살림만을 하며 방황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찾아야 한다.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방콕 여행을 떠나기 전 며칠 동안 그는 물류센터 새벽 알바, 당일배송 알바 등 몇 가지를 시험 삼아해 보았다. 배송일을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 나는 그에게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왜 대학을 나와서 하는 거냐'며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였다. 진짜로 직업에 귀천이 없는 걸까. 그런 말은 요즘에 안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구글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로이스 킴이 유퀴즈에 나왔다. 메일 한 통으로 통보하는 잔인한 해고 방식도 놀라웠지만 그녀가 이후에 했던 구직활동이 더 놀라웠다. 워커홀릭이었던 그녀였지만 당장 아무 일도 없어지니 더 바쁘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성실함과 꾸준함이라는 게 있어서인지 현재는 트레이더조 매장에서 매니저로 있다고 했다.
이제껏 내가 지켜본 그는 꽤 착실한 성품을 지녔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월요일이 되어 회사에 가기 싫어한다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적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고 남을 헐뜯거나 싫은 소리 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내 생각에 그는 성실하였지만 아직 자신에게 꼭 맞는 직업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일까?
내 생각엔 착실했던 그는 왜
코인에 아니 도박에 빠지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