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가 유서를 쓰기 한 달 전부터 나는 그에게 해외로 가족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가족여행지를 고민하였고 방콕을 가기로 그와 함께 결정하였다. 우리는 숙소와 맛집도 이미 여러 번 검색하였다. 어차피 가기로 했던 여행인데 지금 이 상태에서 빚을 더 져봐야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일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첫째 아이는 괌, 블라디보스토크, 샌프란시스코, LA, 파리, 후쿠오카. 이렇게 해외여행의 경험이 있었지만 둘째와 셋째는 여권조차 없었다. 이미 여권이 만료된 그와 여권이 곧 만료될 시기가 다가온 첫째 아이도 새로운 여권이 필요했기 때문에 네 사람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가 대표로 구청에 가서 여권을 신청하였다. 신청한 여권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려 유서를 남겼고, 그렇게 그날 찍었던 사진은 경찰이 인상착의를 물어보았을 때 요긴하게 쓰였다. 그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하마터면 영정사진이 될 뻔했다.
돈을 쓰고 싶어졌다.
살면서 돈을 펑펑 쓰며 산 것도 아니지만 육아를 하게 되면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자연스레 나에 대한 지출이 줄어들게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아끼고 살아야 할지 상상을 하니 갑자기 돈을 펑펑 쓰고 다음 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초등학생이 되면 쓰려고 열심히 모으고 아껴 두었던 마일리지를 털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여권을 수령하자마자 바로 티켓팅을 하였다.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 방콕행 왕복 프레스티지 좌석을 5장 결제하고, 마지막 하루 정도는 쉐라톤 스쿰빗에서 럭셔리 그랜드 스위트룸을 예약하였다. 나는 이미 두 번의 대한항공 일등석을 경험하고 커피가 좋아서 중남미를 여행한 뒤 카페를 개업했다가 그 가게를 매도한 뒤 곧장 한성자동차 매장에 가서 벤츠를 사서 타고 다녔다. 돈을 쓸 줄 몰라서 못 쓰고 산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티켓팅이 어떤 추억으로 남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즐거운 가족 여행
그가 유서를 쓴 지 20일 뒤에 우리 가족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급하게 끊은 티켓이어서 그런지 시간이 맞지 않아 오후 비행기로 출발하였는데, 방콕에 도착하니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 1~2시가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즈음 아이들은 졸음이 쏟아졌고 여기저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업고 달래고 하여 겨우겨우 호텔에 도착하여 다음 날 조식을 먹으며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수영장에서 하루종일 물놀이를 하며 즐거워했다. 유서를 쓰고 나갔던 사람은 온 데 간 데 없었고 그는 다시 원래대로 자상한 아이들의 아빠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9박 10일 동안 나 또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행을 즐겼다. 원래 계획했던 여행을 진행 중인 것처럼.
방콕에 도착하여 처음 며칠은 가성비가 좋은 이비스 리버사이드라는 3성급 호텔에서 지냈는데, 통유리창이 아니어서 그런지 방은 어둡고 좁은 편이었지만 5명이어서 두 개를 잡았더니 나쁘지 않았고, 그 정도면 조식도 괜찮았다. 어린이 전용 수영장이 아이들에게 무릎 정도 깊이 밖에 되지 않아 아이들은 안전하게 놀 수 있었다. 아침에 수영복을 입은 복장으로 내려가면 테이블 옆에 수영장이 있어서 식사 후 바로 물놀이도 가능하였다. 그는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듯 아이들에게 넘치는 사랑으로 사진도 찍고 함께 물놀이도 해 주었다.
하루는 페닌슐라 호텔의 디너 뷔페를 예약하고 갔는데, 아이들에게도 드레스를 입히니 꽤나 근사한 저녁 식사 시간이었던 것처럼 사진에 담겼다. 식사를 끝낸 아이들이 지루함을 보이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산책하였다. 디너 뷔페에서 가장 맛있었던 것은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 석화였는데, 원래 석화를 즐겨 먹지 않는 그는 혼자 자리에 남아 석화를 너무나도 맛있게 먹었다. 아열대 기후라서 그런지 더운 날의 연속이어서 그런지 강바람도 더운 바람으로 불었다. 나는 아이들과 짜오프라야 강의 셔틀보트를 한번 타 보고 싶다고 호텔 매니저에게 요청하였다. 셔틀 보트는 우리를 태우고 강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호텔에 내려 주었다. 아이들은 배를 처음 타 보았는데 긴장하면서도 매우 즐거워하였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사진에 담겼다. 아이들은 만 5세, 3세 두 명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뷔페 식사나 이용이 무료였다. 아이들이 신났던 건 수상시장의 보트와 아기 코끼리에게 바나나 밥을 주는 것이었는데 무척이나 인상에 남은 듯했다. 한참 어린이집에 가기 싫고 꽤가 날 때였는데 온 가족이 맛있는 식사도 하고 아빠와 물놀이도 하루종일 즐기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가 가성비 좋은 아파트를 찾아내어 이틀 정도는 그곳에 지내면서 빨래도 하고, 로컬 음식도 포장해서 먹으며 더운 날씨를 대부분 근처 쇼핑몰에서 보냈다. 황금연휴와 맞물리면서 원하는 숙소를 저렴한 금액에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쉐라톤 스쿰빗에서 럭셔리 그랜드 코너 스위트룸은 마지막 날 하루만 숙박하였는데, 얼리체크인하여 수영장부터 이용하였다. 전혀 도심처럼 보이지 않았던 수풀이 우거진 특급 호텔 수영장이어서 그런지 어떤 공간에서 찍어도 고급 리조트처럼 사진도 잘 나왔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하였다. 그는 아이들보다 더 좋아했다.
우리가 5인이어서 럭셔리 스위트룸 그 이상의 방을 예약해야 했던 것도 있었지만 버틀러 서비스가 있어서 럭셔리룸에 대한 기대가 있기도 했다. 웰컴 샴페인과 마카롱은 꽤나 맛있었고 아이들도 룸이 넓다며 돌고래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룸 내에서 24시간 음료 서비스와 저녁에 두 시간 동안 음료와 칵테일과 맥주가 무료였는데, 커피와 탄산음료를 좋아하는 그는 버틀러 서비스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모든 결정과 결제를 했다. 그는 여행 경비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어서인지 꽤 미안해하면서도 즐거운 모습이었다. 돈을 전부 날려먹어서 잔뜩 쪼그라든 모습을 보았지만 나는 다시 열심히 벌면 이것보다 훨씬 더 호사스럽게 여행할 수도 있다며 걱정 말자고 했다. 그가 일부러 나를 힘들게 하려고 돈을 날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한마디 대화도 없이 그런 큰 일을 저질렀다는 부분과 우리를 버리고 가려고 했다는 배신감에 대해서는 계속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이기에 싸움을 해 봐야 해결은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앞으로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행을 가기로 한 이유 중에는 그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었다. 행복의 기준은 각자 다르지만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내의 좋은 좌석과 호텔의 고급 서비스. 그가 날린 그 돈이면 아이들과 함께 이런 여행을 수백 번은 더 할 수 있었겠지만... 사진 속의 우리 가족은 아름다웠지만 내 속은 복잡한 심경과 함께 타들어갔다.
여행이 끝나고 이틀 뒤 새벽 1시가 되자,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집 밖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