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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Jan 31. 2023

‘때문에‘라는 늪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 룰루 밀러는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애나에게 묻는다. 애나는 열아홉 살이었던 1967년 수용소에서 유전자를 남기기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불임화를 당한 인물이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메리는 “나 때문이지!”라고 농담을 한다. 열세 살에 수용소에 들어온 메리는 애나에게 피해야 하는 직원과 사탕을 나눠주는 직원을 구분하는 법, 그러니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김한민의 그림소설 ’책섬‘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책을 왜 만드나“라는 질문에 책 속의 동물들은 각자의 왼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나? 너 땜에.“ ”난 너 땜에.“ ”난 얘 땜에.“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살아가고 행동하는 사람들 곁에는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때문에’가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 않나?


사실 나는 ‘때문에’로부터 도망쳤다. 오랫동안 나는 매일 출근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만 생각한다면 그리 오랜 시간 일하지 않아도, 적은 돈을 벌어도 괜찮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뒀다. 동시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도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미래의 ‘때문에’도 소거했다. 회사 안에는 ’가정 때문에’ 일하는 선배들이 무수히 많았으므로. 나는 누군가 때문에 어떤 일을 해야 만하는 상황이 괴롭게 느껴졌다. 나에게 ‘때문에’라는 단어는 선택권을 박탈당한, 다소 불행한 미래를 동반하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김밥을 사서 천천히 저녁을 먹고 나니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너에게 전화가 온다. 지친 발걸음이 떠오르는 한숨 섞인 목소리다. “오늘 저녁에 팀선배들이랑 밥을 먹었다? 이런저런 꾸중을 들었는데, 진짜 화나더라. 본인이나 잘하지. 좋게 얘기하면 덧나나.“ ‘이런저런’은 물론 그의 개인적인 얘기를 내 식대로 기억한 것이다. 나는 사실 그 얘기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 듣다 보면 부정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그에게 이유 없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듣는다. 나는 그와의 대화를 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낮에 읽던 책을 이어서 보거나, 책상을 정리하거나, 누워서 유튜브를 보거나, 혹은 잔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쉴 수도 있었지만 그의 하루를 가만히 듣고 위로하기를 택했다. 오로지 너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네가 오늘 하루 기분 상했던 일들을 웃으며 털어 버리고 평온하게 끝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행히 너는 밝은 목소리로 “잘 자”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그다음 따라오는 것은 나의 행복이다. 너의 평온함에 기여했다는 작은 만족감. 아무것도 아닌 내 하루에 의미가 더해진다. 책이나 유튜브로는 발견하지 못했을 그 의미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 때문에 하루의 작은 시간을 포기하는 것과 8시간 혹은 그 이상을 포기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행한 미래는 행복한 미래와 함께 오는 거구나. 그래서 우리 모두는 ‘때문에’의 늪에서 나올 수 없구나. 그 가치를 알든 모르든, 그 안에 빠진 채로 살아가든 온 힘을 다해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든, 어쨌거나 우리는 너 때문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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