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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Mar 29. 2023

우리는 지금 기차에 타 있어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

 잠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서울역이다. 수경은 머리 위 짐칸에서 배낭을 챙긴 뒤 빠르게 기차에서 내렸다. 승객들을 서둘러 토해낸 기차가 쏜살같이 다음 역으로 떠났다. 지난 주말에 혜정과 전화로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


 “우리는 지금 기차에 타 있어. 마음대로 내릴 수는 있지만, 다시 오를 수는 없어.”

 “기차에서 내리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지. 무한정 걷든 히치하이킹을 하든 무슨 수라도 써야 한다는 거지.”


 혜정은 그 허허벌판에 누워있고 싶다는 수경에게 기차 안에서 누워 있으라고 권했다. 기차에 타고 있다는 것이 통제권을 잃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서의 자유를 찾으면 된다고. 어떻게든 기차에서 머무른다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혜정은 남들에게 월급루팡으로 불릴지언정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월급루팡. 귀여운 발음에 비해 어딘가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수경이 진짜 싫은 것은 기차 안에서의 삶이 아니라 가끔씩 주어지는 기차 밖에서의 삶이었다. 지정된 역사에 멈춰 짧은 휴식 시간을 보장받을 때 말이다. 그때의 휴식은 행복하다기보다 불행했다. 어차피 제시간에는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그 후의 시간이 생생하게 그려져 고통스러웠다. 불행한 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제법 잘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게 됐을 때의 막막함이란.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수경은 병원에서 영양사로 일한다. 어렸을 때부터 꿈은 아니었지만, 성적 맞춰 들어온 과가 적성에 맞아 다행이었다. 요리 자체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새로운 메뉴가 담긴 식단을 짜는 일이 유독 좋았다. 수경이 상상 속에서 기획한 신메뉴에 맞춰 가지런히 담긴 음식이 매일매일 배식대 위에 세팅되는 것을 보고 안정을 느꼈다. 

 문제는 일 년 전 새로운 선임 영양사 규익이 오면서 시작됐다. 함께 일하던 선임 영양사 양선은 수경에게 식단 구성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일임하는 편이었다. 한정된 자유로움 안에서 마음껏 뛰어놀면서 새로운 메뉴를 마구마구 도전했다. 조리원들은 조금씩 불만을 표했지만, 그래도 급식을 먹는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이 반응이 좋아 어찌할 수 없었다. 수경의 메뉴를 찍은 사진이 SNS 인기 게시물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양선이 갑작스럽게 병원을 관두게 됐고, 새롭게 온 규익은 아주 깐깐한 슈퍼바이저였다. 수경은 늘 했던 것처럼 새로운 메뉴를 넣어 식단을 짰지만, 규익은 수경이 일을 사서 만드는 편이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가뜩이나 신메뉴 조리가 귀찮았던 조리원들은 금세 규익의 편으로 돌아섰다. 믿을 만한 것은 먼지 쌓인 고객의 소리함뿐이었지만,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은 요즘 밥이 별로라면서도 매일 식당에 왔다. 병원 주변에서는 6000원을 주고는 김밥 한 줄밖에 먹을 수 없으니까.


 “엄마 나 도착했어.”

 수경은 기차에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엄마 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을 하다 발목을 접질려 깁스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미영의 상태는 다행히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엄마는 많이 늙어 있었다. 나도 늙었나 보다. 인생 처음으로 한 깁스야. 미영은 발목을 만지며 말했다. 미영은 지금껏 젊어서 깁스를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젊었을 때 하지 않아도 됐던 일을 늙어서 시작하다 보니 적응하지 못한 신체가 탈이 난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인과관계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엄마의 얼굴을 본 수영은 차마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말은 못 했다. 카레피자, 바질크림제육볶음, 무지개볶음밥 같은 새로운 메뉴를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것에 지독한 권태를 느낀다고. 늦게까지 일을 하다 인생 처음으로 발목을 접질린 엄마 앞에서 수경은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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