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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이면, 한 달 점심 값인데

너무 비싼 시드니과 너무 저렴한 베트남, 그 경계에서

by 민선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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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끼에 낸 돈이면…

내가 사는 곳에서 한 달 내내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다.


한국보다 모든 게 저렴한 베트남, 그중에서도 더 물가가 낮은 남부 지역에서 봉사 활동을 하다가 호주 시드니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 시드니는 한국과 비교해도 모든 것이 2배 넘게 비싼 곳인데, 베트남에 있다 가니 그 물가 차이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여행지에서의 어느 저녁, 퇴근한 현지인으로 가득한 팬시한 레스토랑에서 사워도우 치아바타와 파마산 버터, 샤프란이 들어간 리가토니파스타, NSW 리슬링 한 잔을 시켰다. 비를 맞다 우연히 들어간 그곳에서 따뜻한 빵에 부드러운 버터를 듬뿍 발라 먹고, 숟가락을 요청해 꾸덕한 토마토소스에 버무려진 소고기와 파스타를 떠먹고, 리슬링으로 입 안을 헹구니, 그 호화로움에 지난 고생을 보상받는 듯했다.


이 호화로움의 가격은 61.77 호주 달러. 거의 6만 원에 가까운 돈이다. 시드니까지 날아간 한국 여행자들이 한 끼 식사에 기꺼이 쓸 수 있는 비용이긴 하지만, 나에겐 꽤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이 돈이면 내가 사는 곳에서 한 달 내내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이기 때문이다. 점심뿐만 아니라 매일 커피나 생과일주스까지 사 마실 수 있다. 물론 베트남도 고급 레스토랑은 비싸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내가 매일 점심을 먹는 로컬 식당들은 한 끼에 1500~2000원 정도에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음료는 더 저렴하게 측정되니, 6만 원이면 한 달 내내 점심과 음료를 먹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 ‘이 돈이면…’이라는 가정은 멈추기 어려웠다. 낯선 가격 앞에서 우리는 익숙한 기준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반대로 물가 차이가 여행의 즐거움이 될 때도 있다. 한국인으로서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 메뉴판 가격을 안 보고 시키고, 다리 아프면 하루에도 몇 번씩 카페에 들어가고, 대중교통 대신 택시를 즐겨 타고, 쇼핑도 신나게 한다. 다만 이 기분은 여행일 때만 유효했다. 막상 베트남에서 봉사를 시작하니, 처음에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지만 점점 슬픈 기분이 들었다. 물가는 그 나라의 소득과 소비 수준을 정확히 반영한다. 같은 국가에서 연봉이 다른 것은 어찌어찌 능력주의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베트남-한국-호주의 시급 차이와 그로 인한 물가 차이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단순히 음식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교육과 건강을 비롯한 전반적 생활 수준의 양극화는 점차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물가의 차이는 시선의 차이를 동반한다. 동남아시아에 놀러 온 한국인들이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시선에는 권력이 녹아 있다. 잘 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못 사는 나라에 방문했을 때 가지는 눈빛 말이다. 물론 순수하게 그 문화를 즐기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월한 시선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다. 베트남 식당에서 무례하게 직원을 부르거나 반말을 하고, 어떤 문화에 과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 모든 사람이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저렴한 물가를 경험했을 때 존경의 마음이 들겠는가, 멸시의 마음이 들겠는가? 끊임없이 비교하며 우위를 결정하는 인간의 특성상 나도 모르게 우월감이 생길 뿐이다. 한국인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한국은 모든 게 너무 저렴해서 여행하기 좋아요. 유튜브에서 한국에 방문한 외국인들의 거리 인터뷰 영상을 보다가, 한 미국인이 하는 말을 들었다. 한국이 너무 싸다고? 그 말을 듣는데 왜인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봉준호의 <기생충>를 보다가 ‘지하철 탄 사람들한테 나는 냄새’라는 표현에서 나의 위치를 자각하고 찝찝함이 밀려왔던 것처럼 말이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비싼 호주 여행을 하는 데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시드니에 살던 사람들이 한국을 여행 온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모든 게 2배 이상 저렴해서 여행하기 너무 좋지 않을까. 우리는 베트남과 명확하게 선을 긋지만, 결국 그들에겐 한국이 베트남과 같은 나라였던 것이다. 모든 물가 차이는 결국 상대적이고, 그 기준에 따라 한국은 때로는 선진국이 되고 때로는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차이가 어떤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벌어진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차원에서야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 개개인을 들여다보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 위치가  결정되는 셈이다. 한국 밖에서 봉사를 하고 여행을 할수록, 운이 얼마나 인생에서 크게 작용하는지 깊이 느낄 수 있다. 내 능력과 상관없이 베트남에 태어났다면 2배 낮은 임금을 받았을 것이고, 반대로 호주에 태어났다면 2배 높은 임금을 받았을 것이다. 무언가를 바꾸겠다는 대단한 의지는 없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온전히 내가 쟁취한 게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언제든 잃을 수 있다는 것, 결국 가지고 못 가진 것에 그렇게 일희일비할 건 없다는 것, 동시에 못 가진 상태를 멸시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자는 것, 한국 밖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더 진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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